디베랴 청년들은 부활의 주님을 두번이나 만났어도 마음이 심난했을까? 디베랴 호수 사건은 제자들의 세번째 만남이다. 부활의 첫날, 그 다음주, 그리고 셋째주다. 또는 넷째주. 베드로의 폭탄선언이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때, 일곱제자들은 의리가 있었다. “우리도 함께 가겠다” 이것이 인생이다. 뭘, 그렇게 아웅다웅 살겠다고 칼을 뽑고, 적폐청산을 하고, 우격다짐으로 싸웠던가. 물고기 잡으러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 추억의 물결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법이다.
주님을 만났던 그 때, 그리움의 순간이어라. 그 또한 주님께서 주신 마음이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베드로가 말했지만, 그 마음도 주님이 주신 것이다. 주님은 일곱 제자들을 디베랴 호수로 부르셨다. 인생이, 만약에, 슬픔의 물결이 찾아와서, 과거의 추억이 찾아온다면, 그 또한 주님의 손짓이다. 베드로는 디베랴 호수에서 주님을 만났었다. 누가복음 5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 첫사랑의 장소로 간 것이다.
부활의 주님이 부재하니, 그 먹먹함은 무엇으로도 해갈될 수 없다. 오병이어도 칠병이어도 디베랴 호수와 함께 일어났다. 디베랴 호수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흔적’이다. 심리학자들은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퇴행’이라고 한다. 낙망하면, 사람들은 과거의 행동으로 돌아간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추억으로 복귀, 인간의 르네상스요, 문예부흥운동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멀리 있지 않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책상서랍 속에 감춰진 성경을 펼치면, 그것이 종교혁명이요, 창조의 시작이다. 새벽, 불을 끄고, 방안을 쳐다보면, 태초다.
– 와서 조반을 먹으라.
주님은 날마다 말씀하신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이 말씀이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온다. 신앙의 태초, “예수께서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시쯤 되었더라” (요1:39) 주님의 태초는 요한복음 1:1에 나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주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주님이 어느날 사라졌다. 가끔, 찾아오는 주님과 어떻게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제자들의 고민이요, 믿는 성도들의 간구다. 막달라 마리아도 같은 고민에 빠졌다.
–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내가 가져가리이다.
–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주님은 “나를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붙들리지 않으신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붙드신다. 그날밤, 주님은 제자들을 찾았다. 그리고 말씀했다.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20:21~23)
주님은 ‘숨결’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숨결이 곧 성령이다. 주님의 온기가 온 몸을 감싸므로, 인생은 평강을 얻는다. 밧모섬에 있던 요한을 등 뒤에서 부른 물소리여! 성령은 지중해처럼 요한과 함께 있었다. 주님은 디베랴 호수처럼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씀은 “마트에서 계란 좀 사오렴”이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자상함이다. 그리고, 주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신다. 주님께 가서, 아침밥을 먹자. 주님의 밥상은 추억과 현실과 미래의 축복이다. 주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으로, 전능한 분이다. 알파요 오메가인 주님, 2020년 마지막 날에 주님의 조반을 먹자. 주님과 첫사랑을 찾아가자. 물결치는 그 디베랴 호수로!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의 로마식 이름이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본떴다. 티베리우스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로마를 통치한 황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