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왕이 ‘출국명령’을 내리자, 이스라엘 백성은 탈출의 은혜를 맛보았다. 민족적 사면권이다. 이런 사건은 에스더 시대에도 일어났다. 하만에 의해 민족이 죽을 운명에 놓였으나, 극적으로 죽음을 피하고, 하만을 오히려 장대에 달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시대마다 다르게 변형되어 그 능력을 보이신다. 출애굽 역사도 아브라함이 극적으로 아내 사라를 구출한 사건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극적으로 구출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내’와 같다. 믹돌과 바다 사이에 장막을 쳤더니, 이제 이집트 군대가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로왕이 완악한 것도, 잠시 부드러운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바로왕의 갑작스런 변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급해졌고,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불러 냈느냐”고 따졌다. 그 위치가 비하히롯과 바알스본이다.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비하히롯에 장막을 쳤고, 바다 건너편은 바알스본이다. 비하히롯은 이집트 여신 ‘하르트의 집’이고, 바알스본은 ‘북방의 바알’이다. 이집트 신들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포세이돈처럼! 이집트 바로왕은 자신들을 위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600대 전차를 끌고서 기습작전을 펼쳤으나, 갑자기 암흑과 안개가 짙게 깔리면서 믹돌 근처에서 더이상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동풍사건’이다.
하나님은 “영광”의 단어를 정말로 많이 사용하셨다. 바로왕이 공격하는데,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았는데, 모세가 받은 응답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런 경우는 성경적으로 에서가 400명의 특공대를 이끌고서 야곱을 만나러 온 사건을 연상시킨다. 모세는 야곱의 입장이고, 바로왕은 에서의 입장이다. 모세는 뭔가 특별한 은혜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바로왕이 마지막에 회심하면서 자신들을 순순히 보내주도록 조약식을 체결하는 것이다.
야곱은 실제로 삼촌 라반과 조약식을 체결했다. 하나님은 얍복강을 건너면서 새로운 야곱으로, 즉 이스라엘로 만드셨다.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민족적 세례를 받기 직전이다. 세례는 이처럼 환란과 함께 엄습한다. 초대교회가 성령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했고, 유대교가 총공격을 하던 시점이다. 환란은 풀무불과 같아서 성령의 불을 일으킨다. 다윗이 담대히 골리앗을 향해 나가듯, 우리는 담대히 행해야한다. 상대편도 담대히 싸울 것이다. 승리는 이미 확정된다. 하나님이 이긴다.
모세와 하나님의 말씀이 약간 다르다. 모세는 하나님의 믿음을 백성에게 알려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해결책을 즉시 제시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모세의 지팡이 사건이다. 모세는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왜 멍청하게 서있냐. 손을 들어라. 바다를 갈라서 걸어가라. 내가 할 일은 내가 하고 있으니, 네가 할 일은 네가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미 동풍이 불게 해서 갈대바다(홍해)가 갈라지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바람으로 바다를 열고, 닫으신다.
[출14: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Then the LORD said to Moses, “Why are you crying out to me? Tell the Israelites to move on. Raise your staff and stretch out your hand over the sea to divide the water so that the Israelites can go through the sea on dry ground.
耶和華對摩西說、你為甚麼向我哀求呢、你吩咐以色列人往前走。
你舉手向海伸杖、把水分開。以色列人要下海中走乾地。
손을 들어 지팡이를 앞으로 내미니, 바다가 갈라졌다. ‘들다’는 ‘거제’를 말한다. 제사의 종류는 3가지다. 1)화제 2)거제 3)요제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서 ‘거제’를 행했다. 어떤 제물도 없었다. 믿음은 능히 제물이 된다. 모세는 ‘지팡이’를 하나님께 드렸으니, 그 지팡이는 양들을 치던 ‘인생의 지팡이’였다. 지팡이 속에 수많은 양들이 있었으니, 하나님은 모세가 쳤던 이드로의 양들과 백성들이 잡은 양들을 모두 받으셨다.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게 하셨다. 설령, 가진 것이 없어도, 지팡이를 든 모세처럼 하나님께 ‘삶’을 높이 들어올려 드려야한다. 이것이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성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들어올렸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다면, 주님은 그 지팡이에 의해서 몸이 들려졌다. 모세에게 지팡이가 있다면, 주님께는 ‘몸’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속에 우리 인생이 들어있다.
불에 붙어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 이제 이스라엘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는 구원을 얻었다. 인생은 죄가운데 살아가지만, 성령의 역청이 심령에 있으면 죄악이 침범하지 못한다. 죄는 우리를 원한다. 우리가 죄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죄는 항상 밖에 있다. 밖에서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뱀이 하와를 유혹하듯, 마귀는 우리를 공격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능력을 주심으로 ‘죄의 머리통’을 박살내게 하셨다. 죄를 짓든, 짓지 않든,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가 박살난다. 죄는 ‘뱀의 머리통’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길이다. 이스라엘이 행한 것은 물속에 드러난 육지를 그냥 걸어간 것이다. 이것이 이신칭의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