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거지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그 축복은 경제적 부유함과 비례할까? 꼭, 그렇지 않다. 반비례할까? 그렇지도 않다. 그럼, 둘은 무슨 관계일까? 독립변수다. 아무 관계없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돈이 ‘덫’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복’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시간’의 함수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으로 한정한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100세 시대를 지향하는 초고령화 시대에 ‘보험’은 필수다. 죽더라도 잘 죽으려고….. 탄생에서 죽음까지 모든 ‘타이머’가 맞춰진다. 죽음 이후는 계산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가. 죽음 이후도 계산에 넣어야한다. 수학으로 본다면, 무한대 영역이다. 적분은 0에서 무한대까지 합산한다. 그 기간은 마음대로 조절된다. 0에서 100까지 합산할 수도 있다.
천국생활은 ‘안식과 평안’이다. 아멘! 나는 현재 천국생활을 하지 못한다. 경제적 빈곤함이 나를 옥죈다. 그래서 슬프다. 이 삶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면, 나는 지옥같은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채, 불쌍한 삶을 살아냈고, 비석없이, 장례식도 없이, 쓸쓸하게 죽음을 남길 것이다. 그래서, 남은 자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내 삶을 평가할 것이다. 옛날 조선시대 왕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업적으로 ‘종’과 ‘조’로 이름이 붙여졌다. 태조, 태종, 세조, 세종 등등…. 이름은 성적표다. 대통령도 임기기간 업적이 평가를 받는다. 성경도 살아있는 동안의 행실이 평가받는다. 여기에 역전현상이 발생한다. 뒤집힘 사건이다.
가장 정확한 예시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다. 눅16:19-31을 자세히 읽어보자. 이 세상 제도는 비례관계다. 금수저는 금수저, 흙수저는 흙수저, 상속제도다. 부모님의 유전자가 월등하면, 자녀도 월등하다. 초등학교 성적이 좋으면 중학교도 좋다. 고등학교 내신이 좋으면 대학교 내신도 좋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 콩 심은 곳에 콩 나고, 팥 심은 곳에 팥이 난다. 기본 상식이다. 한국 부자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 역시 부자다. 그런데, 비단옷을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극적으로 살았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 부자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뤘을 것인데…. 둘의 운명이 엇갈렸다. 거지는 죽어서 부자가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거지가 되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 장소가 정반대다. 부자는 음부에서 태어났고, 거지는 천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영원히 그곳에서 살아갔다. 어쩌나?
그러므로,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다. 돈없이 거지로 살면 천국에 간다는 뜻이 아니다. 돈이 많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도 아니다. 돈이 없더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포기하면 안된다. 돈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잃으면 안된다. 돈의 있음과 없음은 신앙의 구원을 연단시키는 ‘환경’인 것이다. 많은 자는 부족한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없는 자는 없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익힐지라.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다. 없음을 행복으로 누리면서 살았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옆에 버려졌어도, 지옥처럼 살았어도 그는 천국의 행복을 맛보았다. 아멘! 마음이 천국이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 부자를 향해 원망할 것 없다. 부자는 거지를 보면서 상대적 우쭐함에 빠지면 안된다. 이것을 기억하라! 인생은 탄생만 있고, 죽음은 없다. 영원히 사는 영혼이 있기때문이다.
장례식은 드레스룸처럼 옷을 갈아입는 공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