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새벽은 정물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음가짐이다. 골목 미술관, 벽에 걸려있는 담쟁이와 호박과 장미넝쿨, 다소곶이 앉아있는 호박꽃과 나팔꽃,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경음악, 이런 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벌써 가을이다.
새벽 5시, 나방 몇마리 골목길을 맘껏 돌아다니고, 나도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빨리 걷기에 너무 고요한 아름다움에 바람까지 불어오니 나는 멈춘듯, 걷는듯, 그렇게 길에 붙들렸다. 모든 그림은 배경따라 채색이 달라지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집안, 집밖, 생각의 느낌이 달라진다. 사람은 동일한데,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인식의 하늘이 바뀐다.
새벽공기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하수도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곳이 있다. 코끝으로 전달되는 그 불편함도 잠시 새벽이 날 감싸면, 말끔히 씻긴다. 낮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새벽에 많다. 해외에 나가면,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풍경과 물건과 사건들이 펼쳐지듯, 새벽은 낮에 대해 해외다.
모든 단절의 끝자락에서 나는 자연을 만난다. 어쩌면, 우린, 너무 오랫동안 자연과 대척하면서 살았던 것은 아닐까? 자연을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한 적이 있을까? 사람보다 먼저 이 땅을 자유롭게 살아왔고, 사람보다 먼저 시간을 깨우는 자연의 근면함을 보노라면, 식물과 동물의 정직함을 인정하고, 그들이 내게 마음을 열고 얼굴을 보여주는 새벽시간이다.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이여!
사람은 동물이나 곤충을 ‘마리’로 센다. 그러면, 동물은 사람을 셀 때, 어떻게 부를까? 자기들과 동등하게 셈할까? 아니면, 사람 몇개? 이럴까? 동물을 폄하해서 셈했으니, 좋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다.
살아있는 존재들속에 앉아, 긴 호흡을 하자, 살아있음을, 존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나도, 저 식물의 잎사귀처럼 오늘 하루를 뻗어가리라. 물방울 머금은 초록의 향기로 삶을 긍정하리라.
지휘자가 없는데도 낮은 베이스로 곤충의 소리가, 높은 소프라노로 새소리가 어쩜 이렇게 어울릴까? 커다란 소나무가 혹시 지휘자인가? 불협화음이 없다. 거대한 곤충을 뜻하는 바람(風)이 혹시 모든 소리를 움직이는 지휘자인가? 본래 모든 소리는 그 자체로 들려 좋은 것인데, 그저 사람이 듣기에 불편한 불협화음이 있을 뿐, 자연은 모든 소리를 조화롭게 허락한다. 까마귀 소리조차 자연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사라지고,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엄마는 아이를 통해 살아간다. 이것이 엄마로서 존재다.> – 드라마 굿 파트너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남편의 술중독으로 인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그때 변호사가 독백처럼 말한 것이다. 그 가정은 이혼했고, 남편은 양육권을 갖고, 비로소 아버지로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가정주부로 살던 그녀는 이혼하고, 아이들을 위해 직장을 갖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혼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알려주는 좋은 드라마다.
<솔로몬 왕이여! 저 아이를 죽이지 마시고, 저 여자에게 그냥 주소서. 죽은 아이는 제게 주시고,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소서> 두 창녀의 솔로몬 재판에서
솔로몬이 칼을 가져와, 살아있는 아이를 둘로 나누려고 할 때, 친엄마는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애걸복걸 매달린다. 살아있다는 것은 ‘존재의 소유’가 아니다.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 창녀에게 소유적 물질개념으로 칼로 나눌 때, 친엄마는 ‘생명’ 그 자체를 바라보니, 살아만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자신을 떠나보내는 심경으로 아이를 보냈다. 또 한번의 산고로 얻은 자식이다. 바울의 편지가 생각났다. “우리에게는 사망이 역사하고, 너희에게는 생명이 역사하길 원하노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