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 오늘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성경말씀을 묵상한다. “죄”를 놓고, 솔로몬은 하나님께 간구했다. 어떤 죄일지라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용서해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성전에 있기에,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모든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했다. 그 성전은 하나님과 제사장이 만나는 곳,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곳이다. 그 만남이 곧 함께 사는 것이라니…. 그 성전이 하나님의 몸이며, 또한 사람의 몸이라니…. 한번 도축당한 제물은 다시 살지 못한다. 아멘! 그렇게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탄생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그것을 반복하면서, 양을 잡아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심으로, 그 육체가 죽고,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셨다. 그 부활의 몸이 곧 나의 몸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안에 자신이 숨겨져 있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계신 곳,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소서” 솔로몬의 기도 내용이 마음에 들어온다. 하나님이 계신 곳, 그곳이 하늘이다. 천국이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항상 성전의 지성소, 속죄소에 앉으셨다. 죄를 용서하는 은혜를 베푸시려고, 속죄소를 의자처럼 앉으셨다. 그 속죄소가 곧 내 마음 깊은 곳, 가장 더러운 곳, 탐욕과 정욕과 어둠이 깊은 곳, 창세기 1장 2절, 흑암의 깊은 곳이다. 그곳에 주님이 오셔서, 빛을 창조하신 것이다. 내 육체는 분명 그 감정이 살아있다. 불교의 고행으로 육체의 감정을 죽이는 것이 ‘성화’일까?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육체를 죽이는 일일까? 인간의 의지로 육체의 감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오셔야, 하나님께서 속죄소를 덮어주셔야,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계셔야, 성령의 바람이 깊은 흑암 위에 있을 때, 그때 빛이 임했다. 성령께서 육체의 감정을 다스려야, 다스려지는 것이다. 성령의 존재, 성령의 사랑, 성령의 인격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육체는 죄를 짓는다. 돈을 사랑하고, 여자를 보면 반응하고, 능력있는 자를 향해 시기하고, 싫은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싫어지고, 십자가의 모습을 거부한다. 멸시, 핍박, 저주, 충언, 핀잔, 무시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 육체는 겸손하지 못하고, 낮은 곳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말로는 “낮은 곳에 있다”고 거짓 자랑한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내 마음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육체를 이미 십자가의 사망에 못을 박았다고 하셨다. 사망선고다. 나는 내 장례식에 죽을 것이다. 그런데, 심판자,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사망선고일을 “주님의 십자가”로 이미 정하셨다. 그 사망선고일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 장례식은 세상이 정한 사망선고일이다. 하나님은 내 육체가 이미 죽었다고 판결하셨다. 십자가 사건이 믿는 자에게 소급 적용된다. 아멘!!
바울의 선언처럼, 육체로 행한 것과 행할 것들이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것이라고 해서, 죄를 즐길 수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께서 지으신 내 마음속 새피조물이 육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매일 죄와 싸우면서, 하나님을 말씀으로 사귀면서,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음성을 인격적으로 들으면서, 내 육체도 언젠가는 거룩함의 길로 돌아설 것을 믿는다.
창세기 12장을 묵상한다. 아버지가 죽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잠겼을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를 떠나라.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은 그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헀다.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 아멘! 매일, 매순간 말씀을 향하면, 말씀이 말씀한다. 성경의 어느 것이든, 모두 하나님의 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태초의 그리스도이며, 이땅에 성육신했고, 부활의 몸을 입으신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대목을 읽는데 마음이 애잔해지며, 그가 걸어간 그 막막함, 사막의 정처없는 떠남, 그를 의지하고 함께 길을 떠났을 믿음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믿을 수 없는 것애서 아브람이 붙든 것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다. 그 음성이 기록의 형상을 입고 지금 우리에게 있으니, 날마다 아브람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마침내 그것에 도착했더니, 하나님이 나타나 또 말씀하셨다. 이 땅을 네 자손애게 쥬리라. (창12:7) 이 대목을 읽는데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브람은 자식도 없는데,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다.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남방으로 내려갔다.
하나님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아브람을 막지 않고, 함께 내려가셨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인격을 생각한다. 왜, 하나님은 “네게 이 땅을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을까? 아브람이 걸어간 그 길,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고, 기근이 찾아오고, 현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께서 믿을 수 없는 약속, “네 자손”을 말씀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자신의 현실로는 전혀 불가능하게 보였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그는 신뢰하고 기다렸다.
내 인생도 풀리지 않는 안개 속이다. 직장 문제도 풀릴 듯, 말 듯, 그럭저럭 살아간다. 마치 기근이 들어 남방에 내려간 아브람처럼 나도 에어컨까지 내려온 것 같다. 이 끝이 어찌 될지 나는 모르겠다. 단지, 하나님의 밀씀을 날마다 묵상하며, 내게 지금 말씀하시는 그 음성, 성령의 음성을 따라 매일 매일 달팽이처럼 살 뿐이다.
[말씀묵상 및 간증]
세상뉴스는 뻔하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혹은 드라마, 연예인 가십 등등 로마제국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엠마오로 낙향하는 두 제자, 곧 안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부부가 예수님을 이야기했다. 십자가 사건을 놓고, 함께 대화를 하면서 걸어갔는데, 그 나그네가 예수님이었다. 우리의 대화 사이에 항상 함께 계시는 주님, 주님은 주님을 이야기하길 기다리신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예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목, 함께 자동차 교제를 했다. 모든 주제는 주님을 만난 말씀의 교제였다. 에덴동산 사건은 하나님이 맺은 가정이 어떻게 파멸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반면, 어제는 가정이 어떻게 회복되는지 듣는 시간이었다. 최근에 십자가에 메달린 주님이 자신과 상관있는 죽음이란 것을 성령의 통찰력으로 깨닫고, 주님과 사귐, 죄와 싸움을 시작한 형제가 나눠준 간증이다. 아내는 가족 중에 단 한명이라도 주님께 깨어, 말씀으로 살아야, 가족이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날마다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엎드리며 살아냈다. 남편이 원하는 가정생활이 아니었으나, 어느날 남편이 그런 아내의 삶을 보면서, “우리 가족을 살리려고 저렇게 몸부림을 치고 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도 지금은 아내가 걸어가고 있는 말씀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 에덴동산처럼 무너진 가정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여기는 곧 주님의 말씀이다.
나 역시, 2주전, 교회에서 ‘복도교제’가 내게 큰 은혜가 되었다. 복음서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간증 모음집이다. 그리고,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십자가와 부활을 기록하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꾼 누나를 통한 말씀의 교제였는데, 유독 그날은 나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고 계심이 들렸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그 사람 속에서 말씀하시는 근본자,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말씀묵상”을 해야, 주님을 알 수 있고, 주님을 사귈 수 있고, 어둠의 세계속에서 숨쉴 수 있고, 빛의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그 말씀을 붙잡고, 매일 조금씩 말씀묵상을 하고 있다.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하세요”라고 전해 들었던 나아만 장군처럼, 나는 매일 내가 기록한 수첩의 말씀속으로 나를 던진다. 말씀수첩 안에서 생각으로 목욕한다. 그게 말씀묵상이다. 그랬더니, 이제는 말씀이 좋아지고, 성경도 좋아지고, 자주 주님의 흔적을 생각하고,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훨씬 크게 보인다.
어려움을 통해 상대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다. 동병상련, 고난은 내게 유익이다. 고난이 없다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향해 판단과 정죄밖에 없다. “왜, 믿음이 저것밖에 안돼! 노력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힘들지! 본인 죄때문에 받는 형벌이지! 안해서 힘들지! 결단을 해야지, 능력부족이야!” 등등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과 정죄를 마음속으로 던진다. 그러나 고난을 겪으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상대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으로 인생이 빚어진다. 고난을 통해 결국 내 안의 견고한 진이 무너진다. 신앙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보는 것이다. 주님이 누구인가? 주님이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내셨는지, 주님의 그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곧 주님의 형상이다. 인생의 바다는 문제의 파도가 평생 출렁거린다. 바다는 파도가 있어서 바다다. 인생도 문제가 영원히 나타난다. 문제를 없애는데 시선이 가면, 절대 안된다. 예수님을 향해야 한다. 말씀을 집중할 때,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바라볼 때, 성령을 통해 말씀의 더 깊은 의미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문제에 봉착하면,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지금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아는 것, 성령을 통해 알게 해주시는 것, 그것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와 상관있는 십자가! 내가 겪는 문제가 주님과 상관이 있을 때, 주님을 사귀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이 해야할 것은 3가지다. 문제가 있는가?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감사하고, 그리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와 감사,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 이것만 하면 된다. 주님보다, 말씀보다, 문제 자체를 크게 보는 사람은 말씀을 향할 수가 없다. 주님이 커질수록 문제가 점점 작아져서, 문제가 문제가 아니게 된다.
세상이 보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 그 “어려움”에 관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상대를 찾아가 사연을 듣는다고 해도, 그 사람을 헤아릴 수가 없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데, 그게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보는 훈련을 그래서 해야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의 눈으로 상대까지 볼 수 있다.
세상이 볼 때 볼품없는 삶, 병, 고난, 결핍, 상실, 형벌, 실직 등등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옷이다. 하나님이 결핍을 통해 부르신다. 더 가까이 두시려고, 하나님은 더 큰 고통으로 사람을 낮추신다. 세상이 볼 때, 바닥까지 추락한 것인데, 하나님이 볼 때,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가는 통로를 지나고 있다. 좁은문이다. 초대교회는 죽음까지 하나님이 허락했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겪으면서 알았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보여주시려고,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는 풀무불 형벌까지 허락했다.
마귀의 관점은 지협적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전체를 본다. 마귀는 내 중심, 내 기쁨, 내 행복을 보게 한다. 하나님은 지구 전체를 볼 수 있게 한다. 내가 만약 북한에 태어났더라면…. 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다. 성령의 마음이다. 내가 만약 조선시대에 천민으로 태어났다면…. 이 생각만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을 감사할 수 있다. 마귀는 내가 처한 환란과 역경만 보게 한다. 마귀의 생각을 따르면, 입에서 불평과 욕설만 나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게 한다. 노란 은행잎을 노랗게 볼 수 있는 눈! 은행잎이 바람에 날아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사실은 감사할 수밖에 없다. 마귀는 이기적 시각에 가두고, 하나님은 자기중심의 감옥에서 벗어나, 세상 전체를 볼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
믿음의 훈련이란, 하나님이 나를 보는 훈련이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이것이 출발점이다. 예수님이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셨고, 용서하셨고, 사랑하셨는가. 세상은 본질적으로 미쳤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나를 멸시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눌림과 교만, 2가지 감옥에서 해방되는 열쇠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죄악에 빠진 세상을 사랑하셨는가. 이것만 생각하면, 금방 자유가 임한다.
네가 검을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100% 하얗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세상 전체는 모두 검다. 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그게 장땡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얗게 된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검은지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자, 성령의 음성이 들리는 자,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 말씀을 먹으면, 판도가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귀를 통해 받아서 먹는다. 매일 말씀묵상을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전체를 보는 눈]
눈물겹다. 노오란 은행잎이 내 앞으로 흔들리며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일꾼 누나와 교제를 나눈 말씀이 생각났다. 온종일 나를 바라보는 주님을 생각한다. 전전긍긍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며 살려는 내 마음이었는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살려고 한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내 감정’을 중심한 삶이었다. ‘전체를 보는 눈’이 하나님의 눈이다. 내 인생 전체를 본다. 나는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존재였다. 특히, 이단에 빠져서, 그곳을 천국으로 믿고, 30년이나 살았는데, 트루먼쇼처럼 나는 그 무대를 빠져나올 수 없는 자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꺼내주셨다. 그 사실만 생각해도, 어찌나 감사한지, 지금 내가 당하는 결핍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바라는 꿈들이 모래처럼 작아진다. 전체를 보는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하루 생각하며 알게 됐다.
전체를 볼 줄 아는 눈, 연역적 관점은 인문학 강의에서 종종 들은 이야기다. 매일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훈련도 ‘성경읽기 프로그램’에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하나님이 내게 그날 해주신 말씀이며, 그 말씀의 씨앗이 이제야 내 마음의 화분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줄기를 뻗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감사가 나온다. 내 안에 있는 말씀의 씨앗이 새가 먹지 못하도록 성령님이 보호해주셨구나! 내 마음속 돌들, 가시덤불을 주님이 모두 없애주셨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 마음속에서 말씀이 씨앗이 자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내 삶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여전히 갚아야할 빚, 중노동의 직장, 중년의 허탈함, 모두 그대로다. 그런데, 나는 이런 현실이 가벼워졌다. 내 인생 전체를 쳐다보니, 감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 내가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다니! 십자가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드린 이 사실 앞에 나는 감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을 주님께 간절히 의뢰를 해야한다. 그때 주님께서 고난속으로 들어오신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 십자가의 삶이다. 나의 고난이, 나의 행복이, 나의 인생이 만약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게 지옥이다. 로마서 7장은 두 존재의 전쟁을 말한다. 항상 주님께 의뢰하면서 살면, 그때 마음의 세상에서 두 존재가 느껴진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기는 힘, 다른 하나는 어둠의 마귀가 당기는 힘이다. 마귀는 세상을 보암직하게 보여주면서 끌어당기고,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한다. 예수님이 커질수록 성령의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린다. 말씀묵상이 곧 성령의 통치다. 술에 중독된 사람이 술과 싸워 이기는 것은 백전백패다. 술 뒤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다. 나와 술의 싸움이 아니다. 성령과 악령의 전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것을 놓고, 기도해야한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빛이 어둠을 이긴다. 죄악의 사슬을 고행으로 절제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나님을 사귐으로, 말씀을 날마다 맛있게 먹음으로, 하나님께서 죄악의 사슬을 끊어내신다. 기도하면, 반드시 성령의 은혜가 온다. 그때,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된다. 마귀는 만족감을 주면서 거기서 멈추게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한다. 목마른 갈증, 주님을 간절히 찾는 그 마음이 날마다 있어야 한다.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은 오늘, 내일은 내일이다. 매일 성령을 찾으며, 하루종일 간절히 바라며,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 전화가 언제 걸려올지 수시로 기다리듯, 그렇게 사는 것이다. 하루종일, 기쁘나 슬프나 평생 생각나는 그분, 내 남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가장 경멸하고, 멀리했던 구원파 신앙이 나도 모르게 들어와 있었다. 나는 아니겠지, 그 틈을 삐집고, 마귀는 소리없이 들어와 숨어있다. 오랫동안 머물러서 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입술로는 주님, 주님, 주님하면서, 내 마음에 내가 하나님이 된 신앙! 믿음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주님을 맞이하고, 영접하고, 동행하고, 함께 사는 것이다. 지금,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가. 주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듣길 원하는가? 주님의 말씀 없이는 정말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가? 주님 없이도,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도 나 혼자서 척척 잘할 수 있다면, 그건 주님과 상관없이 사는 자다. 믿음은 주님과 사귐이다.
<주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의견을 들으면서, 주님의 허락을 간절히 구하면서 사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분명히 있다.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정 주님의 말씀을 구하면서 사는가? 요한복음 15:5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지가 할 일은 나무에 붙는 것이다. 내가 평생 유일하게 할 일은 주님께 붙는 일이다. 매일, 붙어야 한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주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주님의 사랑에 굴복되어야 한다. 그 사랑에 굴복되려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나를 위해, 내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된 그 사랑을 알 때, 마음의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
찬양이 찬양사역인가? 찬양을 통한 사랑의 고백인가? 성령충만을 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내 중심에 내가 가득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간구한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성령충만이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고, 여전히 내가 가득하면, 그곳은 주님이 계시지 않으니, 마귀가 들어온다. 예수님 안에서 죽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사는 것이다. 죽어야 새 피조물이 된다. 옛사람이 죽는 것이 확실히 되어야 한다. 사형수가 사형을 당해야 하는데, 누군가 대신 형벌을 받고, 자신이 그 사람으로 인해 자유의 몸이 되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주님이 우리 대신에 죽으셨다. 그 죽음이 나의 죽음, 내 죄의 죽음이다. 그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마음이 높아질 수가 없다.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 안에서>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어떤 나를 사랑하셨는지, 그것을 진정 깨달아야, 주님께 전적으로 굴복할 수 있다. 중심에서 나오는 존경심은 용서를 통해 생긴다. 주님께서 얼마나 큰 용서를 베풀어 주셨는지, 그 은혜를 알고,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말과 옛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같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치르셨다. 이 사실을 모르면, 내 힘이 들어간다. 내가 내 죄를 감당하려는 것이 내 능력이다.
옛사람은 죽었다. 나는 죽었다. 새로운 나, 새로운 신분의 나는 전적으로 주님을 통해서 살아가는 존재다. 주님과 연합한 새 피조물은 주님의 열매를 맺는다. 내 능력은 죄의 열매 밖에 없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에서 방점은 ‘능력’이 아니다. 능력을 주시는 ‘주님’에 방점이 있다. 오직 사랑으로 귀신이 떠난다. 나조차 나를 사랑할 수 없지만, 주님은 이런 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우주보다 큰 은혜로 덮으신다. 악령이 세상을 덮어도, 오직 주님 안에서 자유하다.
성령이 오셔야 가능하다. 나 혼자, 자기 스스로는 절대 안된다.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도 성령이 오셔야 가능하다. 봄날이 와야, 얼음이 녹듯, 성령이 오셔야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주님 안에서 새 피조물이다. 성령을 간절히 의뢰해야 내 힘이 빠지고, 내 행위가 약해지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기도, 찬양, 간증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실력으로 하면 내 행위, 내 중심일 뿐이다. 기도와 찬양과 간증은 하나님과 사귐에서 나온다. 부활복창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종교적 행위에 마침표를 하고, 악순환의 고리는 끝내야 한다. 부활복창, 기도, 찬양 모두 주님을 알고 사귀며,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기 위함이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 사랑의 부재가 어둠의 통치다. 빛은 곧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마음이 어둠이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하고, 나를 어떻게 주님이 사랑하셨는지 그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 몰두하는 이유는 그 사랑을 하기 위해서다. 죄인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안다면, 나를 위해 살아가는 내 중심, 내 행위를 멈출 수 있다. 이 또한 성령이 오셔야 가능하다.
사랑의 능력은 한순간에 되지 않는다. 쌓이고 쌓이면서, 사랑의 집이 건축된다. 먼저는 성령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면서 마음이 달라진다. 모세는 그러한 연단을 40년 넘게 받았다. 광야생활을 통해 모세는 40년 다듬어졌고, 백성들을 이끌면서 또 40년 다듬어졌다. 하나님은 다듬어서 사용하신다.
<판단과 정죄>는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마음이다.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해석하고,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마귀의 자식, 마귀의 속성이 판단과 정죄다. 판단과 정죄는 사랑의 독약이며, 사랑을 파괴하며,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공동체는 나와 너의 벽이 사라지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 반면, 판단과 정죄는 나와 너의 경계를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구분한다. 에덴동산의 회복이란, 환경의 회복이 아니다. 사랑의 회복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 아담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위해 데려온 하와를 향해,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다. 남편과 아내의 경계가 없었다. 포도나무 말씀이 곧 사랑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본질을 바꾼다. 더이상 죄에 끌려다니는 종노릇을 하지 않게 하려고, 내 죄를 십자가로서 용서하셨다. 죄를 짓는 존재의 본체가 사망했다. 죄를 짓게 하는 근원, 곧 마귀가 그때 죽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죄의 근원이 죽고, 첫사랑이 회복한다. 첫사랑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그래서 세상으로 채워질 수 없는 존재다. 마음이 누리는 기쁨과 자유도 동일하다. 자든지 깨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려고 십자가의 큰 구원을 창조하셨다.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창조작품이 ‘자유의지’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듯, 하나님도 자유의지가 있다. 선악과는 생명을 담보로 자유의지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자,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랑으로 내려오셨다. 낮고 낮은 땅에 태어나 비참하게 죽으신 주님이다. 사랑하려고, 사랑이 전부인 하나님의 본심이다. 생명을 걸고 말씀하신 선악과였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 선택한 사랑이다.
범죄한 나, 곧 하나님을 모르는 나를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사랑이 십자가다. 그 사랑은, 그 십자가는 창세전부터 변함이 없었다.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랑의 복음을 지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복음은 실제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며, 지도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이 걸어가신 삶, 십자가와 부활을 보면, 천국이 보인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천국의 모습과 형상이 그려지고, 인지되고, 느껴진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환경이 어떠하든, 천국을 느끼고, 그 나라를 날마다 바라보고, 소망한다. 스데반은 돌로 맞아 죽으면서도 하나님을 봤고, 느꼈고, 천국의 문이 열렸다. 바울도 감옥에서 찬양을 했다. 주님과 함께 갇혔던 바울은 그곳이 천국이었다.
손이 하는 것이 발이 하는 것이다. 지체는 지체를 위해 일하고, 모두 머리가 하는 일이다. 목회는 주님의 일이며, 모든 성도들이 주님과 연합해 있으니, 함께 목회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함께 살려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작은 신음까지도 하나님은 함께 하길 원하신다. 의사표현을 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꿈”은 “목적”이다. 누구든지 꿈이 있다. 사람은 꿈을 쉽게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계획한 사랑의 꿈을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로 확증됐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마음을 고정하면, 그때부터 예수님과 사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