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법원에서 “무죄”라고 판단하면,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일까? 법조문이다. 법조문에 그 사람의 죄에 대해 “무죄”라고 규정된 것은 없다. 법률적 잣대를 그 사람의 행위에 적용해서, 무죄라고 무게가 측정되면,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판사의 양심과 해석이 개입한다. 왜곡이 여기서 발생한다. 어떤 왜곡은 법률적 오차범위 안에 있어서, 법적 허용이 가능하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법률소송의 사각지대를 알지 못하고, 우리는 매번 세상뉴스에 속으면서 살 뿐이다. 세상이 모든 사건과 뉴스와 해석들이 진리는 아니다. 진리, 혹은 진실을 알려면, 더 가까이 가서, 그 사건을 면밀히 조사하고, 판단한 것에 대해 다시 해석해서 자기만의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법조문에 나와 있는 글자, 단어, 토씨를 살짝 비틀어서 해석의 범위를 확장하거나 법규정의 취지에서 벗어날지라도 그 해석을 현실에 적용할 경우, 합법적 왜곡이라고 한다. 이러한 왜곡,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변경된 해석이 법률판단에서 자주 발생한다. 법원은 법률해석의 싸움이어서 그렇다.
법규정의 문구를 살짝 변경할 경우, 없는 단어를 끼워 넣어서 본질을 완전히 바꿀 경우, 그것으로 무죄가 유죄가 되기도 하고, 유죄가 무죄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입찰지침서의 규정을 살짝 변경해서, 뽑고 싶은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서 ‘맞춤형 입찰규정’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도 의미를 왜곡해서, 합법적으로 법률을 이용하는 것인데, 정도가 지나칠 경우, 혹은 꼬리가 길어서 ‘불법행위’가 들통날 경우에는 덫에 빠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언어로 형성된 법률규정은 단어 하나를 추가하거나 빼더라도, 그 의미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즉, 해석의 오차범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희롱은 무엇일까? 법률조문에는 “성희롱은 성적 언동 또는 상대방의 성적 수치심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기타요구 등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교육상 또는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일체 행위”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성적 수치심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를 ‘느끼게 하는’으로 바꿔서 적용하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즉,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줄지라도, 만약에 고용상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면 성희롱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성희롱 발언을 할 경우 면책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법률판단을 적용할 때, 자기편의 사람들을 보호할 때는 ‘수치심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으로 해석해서, 성희롱 범위를 축소시킨다. 칼자루를 잡은 쪽에서 판단을 할 경우,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법률적 구제를 요청할 수 있는 방안이 거의 없다. 상급기관에 이의를 신청할 경우, 상급기관은 하급기관의 결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사림은 지식집단이다. 이들은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으로 각각 나뉘어서, 여당과 야당의 정치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망한 것이 아니다. 국론분열을 일으킨 당쟁으로 속이 썩어 뭉그러진 것이다. 예송논쟁은 특히나 왕권의 명분을 트집으로 삼으려고, 3년상이냐 1년상이냐, 왕이 언제 상복을 벗느냐를 놓고, 목숨걸고 다퉜다. 한심하기 그지 않는 그들의 싸움은 그 당시에는 ‘명분’을 차지하기 위한 ‘생존본능’이었다. 성리학에 근거한 문구 하나, 단어 하나를 놓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해석의 방향은 항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였고, 겉으로는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우겼다. 이것이 ‘법률적 왜곡현상’의 대표적 사례다. 언어의 굴절현상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의 심층적 깊이’때문에 발생하는 오차범위를 놓고, 사람들은 다툰다.
남이장군도 같은 사례다. 세조 당시 남이장군은 20대 중반에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오른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등극하고, 남이장군은 병조판서에서 좌천되었다. 한직에 물러난 그가 어느날 나타난 혜성을 보면서, “옛것은 물러가고 새로운 것이 오는 징조”라고 말했다. 그것을 몰래 엿들은 유자광이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알렸고, 정적을 숙청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던 한명회와 신숙주는 단칼에 남이장군을 ‘역적’으로 모함했다. 그때 사용한 것도 ‘왜곡’인데, 사실은 ‘날조’에 가깝다. 남이장군의 한시에 보면, 남자 20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어찌 사나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대목이 나온다.
미평국(未平國)을 유자광은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서, 남이장군을 무고했다. 그런데, 교묘히 고쳐서 작성된 한시를 물증으로 채택한 조정은 남이장군을 죽이고 말았다. 남이장군은 역모죄로 죽었으니, 그의 가문이 몰살했다. 당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영의정 강순이 고개를 돌려 외면하자, 남이장군은 “강순과 함께 역모했소”라고 거짓자백을 하면서, 강군도 역모죄로 처형당했다. 언어는 ‘平’을 ‘得’으로 살짝 바꾼 것만으로도 목숨이 왔다갔다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