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 한통을 받았다. 바울 형님이 내게 보낸 편지, 골로새서다. 골로새서 말미에,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읽으면 되는 것인데…. 바울 형님은 특정인에게 보내면서도, 누구나 그 편지를 읽고, 성령을 따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랬다. 공간을 넘어, 시간을 넘어, 내가 그 편지를 받는다. AD62년에 작성된 편지이니, 62세, 환갑을 넘긴 형님이 내게 보낸 편지다. 나는 그동안 바울을 ‘신약성경 저자’로서 ‘순교자’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사명자’로만 인식했지, 나와 연결된 접점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는 편지로서 바울형님과 내가 만난다. 나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로 나를 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몸속에 생명이 감춰졌으니, 바울형님도 나도 모두 그리스도의 몸속에 생명이 감춰졌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리는 하나다.
신학공부, 설교, 성경공부를 통해 골로새서를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한 공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지식과 학습이 ‘편지’를 읽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지식 자체를 보게 하면서, ‘골로새서’를 읽지 못하게 한다. 즉, 수건처럼 편지를 덮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이단에 있었을 때, 이단의 거짓된 진리를 ‘진리’롤 믿고서, 성경을 볼 수 없었다. 성경을 봐도 성경이 보이지 않고, 이단의 교리만 보였다. 이게 심각한 문제다. 이단을 벗어났어도 동일했다. 이단을 탈출하고, 4년이 지난 지금, 비로서 성경을 성경을 보게 된다. 도대체 편지를 해석할 이유가 있는가!!! 어머니가 내게 편지를 보내면, 내가 그 편지를 읽으면 되는데…. 내가 만약 문맹이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그럴지라도 편지를 대신 읽어주면 들음으로 뜻을 알 수 있다. 편지는 뜻이 가장 쉽게 전달되는데, 편지를 해석함으로 편지의 원문을 볼 수 없게 하니, 그게 성경공부의 맹점이다.
나는 온종일 골로새서를 소리내서 읽었다. 그리고 비로서 알게 됐다. 내가 바울형님의 편지를 편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을!!! 편지의 목적은 내용전달의 간편성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편지를 쓴다. 바울형님이 어렵게 편지를 쓸 까닭이 없다. 골로새서 1:24을 읽고 나는 몹시 놀랬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말씀을 읽는데, 이 구절에 대한 신학도서와 각종 유튜브 영상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옛날 같았으면 그것을 들었을 것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 바울 형님이 나에게 보낸 편지인데, 왜 다른 사람의 해석을 받는가!! 문장이 전혀 난해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 나는 골고다 언덕에서 모든 고난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었다니!! 바로 부활의 몸된 공동체,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서 갈등을 일으키고, 힘든 일이 발생할 때, 그때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는가!!
골로새서 편지는 4장밖에 되지 않는데, 내가 평생 바울 형님이 나를 위해 성령으로 손편지를 썼다는 그 믿음으로 편지를 읽은 적이 없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로마 감옥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도중에 내게 남긴 편지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간다. 옛사람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고 나는 믿었다. 그런데 바울형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나는 음란한 생각이 들어온다고 인식했는데, 바울형님은 ‘음란’을 육체의 지체로 봤다. 아멘!! 탐심도 지체다. 그래서 탐심이 계속 생기는 것이다. 그 탐심을 내가 죽여야 한다. 땅에 있는 지체가 이미 죽었다면, 죽이라고 권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땅의 지체, 곧 옛사람을 죽여야 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마음도 지체다. 지체여서 각종 생각들이 칡넝쿨처럼 뻗어, 내 영혼까지 기어 올라온다. 악한 생각들, 땅의 지체를 날마다 죽여야 한다. 아멘!! 죽이는 방법은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계속 말씀을 소리내 읽고 묵상하므로,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생각으로 행하신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곧 내가 나의 육체, 곧 땅에 속한 지체와 싸우는 것이다. 내 육체의 욕심과 탐욕과 각종 음란과 쾌락의 지체와 싸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은 가족 공동체를 위해 서로가 사랑의 섬김으로, 사랑의 종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상대의 허물을 덮지 못하고 지적한다면,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듯이 죽이는 일이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는 점점 자신에서 가족으로, 교회로, 이웃으로, 세상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