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피난길에 올랐다. 압살롬의 반란! 아들과 전쟁! 너무 갑작스럽게 터진 일인데, 지혜의 왕 아히도벨마저 압살롬에게 합류했다.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이 겪었을 평생의 수모를 생각한다면, 그의 선택에 인간적 동조가 일어난다. 나는 월곡산을 오르면서, 2주 넘게 피난길을 떠난 다윗의 길을 함께 했다. 내 인생이 궁지에 몰린 탓에 내 마음은 다윗과 훨씬 가깝게 밀착할 수 있었다. 세상이 주는 포도주는 하늘을 흐리게 보게 하고, 세상이 펼친 검은 커텐은 하늘의 창문을 열게 한다. 세상을 못 보는 그 어둠이 내 마음에 십자가의 빛이 들어오게 한다. 이런 역설 앞에 나는 성경을 아내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나는 깨끗함으로 주님의 깨끗함을 덧입은 것이 아니다. 나는 더러움으로 주님의 성결을 받았다. 나의 더러운 그 죄악의 좌표에서 주님을 보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는 이런 사랑에 있다. 어쩌면, 내가 -무한대로 떨어질지라도, 주님의 사랑을 붙든다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음같이 성령의 열매가 내게 열릴 것이다. 아멘!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해임당했다. 다윗의 인사정책은 압살롬 이후에 칼처럼 단행됐다. 나는 여기서 주님과 인간관계를 목격했다. 아! 수많은 교리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교리(敎理)는 가르치는 진리이며, 오랫동안 알려진 성경의 해석을 의미한다. 나는 성경을 성경의 근본으로 알지 못한 탓에 이단에 30년 넘게 살았다. 그 덕택에 나는 어둠의 깊이를 알게 됐고, 흑암의 깊은 곳에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도 ‘빛이 있으라’ 하시므로, 이단에서 십자가로 옮겨짐을 받았다. 그러나, 이단에서 배웠던 그 진리의 해석보다, 기독교의 교리는 훨씬 복잡하고 난해했다. 게다가 해석이 안개처럼 모호했다. 도대체 내 죄는 어찌 되는 것인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런 중에 붙들게 된 사무엘서 성경이 내 삶의 발등에 등불이 되었다. 내가 가야할 길의 먼 곳이 설령 보이지 않아도 내가 내딛는 걸음의 방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주님의 손길이다. 그 중 하나가 오늘 적는 이 글이다. 나는 매일 성경의 작은 사건을 읽으면서, 내 삶에 적용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적용이 곧 말씀의 비춤이다.
1) 시므이와 다윗, 그리고 아비새
2) 므비보셋과 다윗, 그리고 시바
3) 바르실래와 다윗, 그리고 김함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가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권력을 다시 잡은 다윗 앞에서 목숨을 구걸한 것이지, 진정 마음의 죄를 뉘우쳤을까? 죄를 철저히 자복하지 않았을지라도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했다. 그 용서가 나를 향한다. 내가 여전히 어둠의 그늘에 있을지라도,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하셨으니, 그 은혜가 내 마음을 맑은 물로 씻는다. 아비새가 분노하는 것은, 창녀와 연합한 동생을 향해 분노한 형처럼 그러할지라도, 주님은 그 누구든지 주님께 돌아오는 자를 영접한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공궤를 받은 자다. 그 사랑을 맛 본 자가 다윗과 함께 떠나지 않았고, 그의 종이 므비보셋을 모함해서, 다윗과 관계가 어긋났다. 놀랍게도 므비보셋은 자신의 행위를 철저히 반성하면서, 다윗과 공간적으로 함께 하지 못하였지만, 심령적으로 함께 하였다. 피난길에 오른 다윗처럼 므비보셋은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그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므비보셋을 향해 다윗은 단호했다. 시바와 함께 소유를 나누라! 값없이 받은 소유인데, 왜 므비보셋은 자신의 종과 그런 앙금이 있었을까?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했고, 므비보셋은 다윗과 함께 떠나지 않았다. 그런 두 인간 부류 앞에서 다윗의 처분에 주목한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용서받았으나, 상급은 없다. 왜냐면, 행한 것이 없으니까! 피난길에 직접 함께 하지 않았으니, 그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상급도 없다.
바르실래는 달랐다. 다윗과 함께 했다. 다윗을 공궤하니, 다윗이 말하길, “나와 함께 요단을 건너서 예루살렘에 가자!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지금 내가 주님을 믿는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할까?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로 부정하는 영적 시므이처럼, 주님의 피난길에 동행하지 못한채 현실에 묶여 살아가는 므비보셋처럼, 혹은 주님과 지금 삶속에서 함께 말씀으로 부등켜 안고, 성령을 공궤하면서,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고, 동침하며, 연합하는 입맞춤의 바르실래처럼! 3가지 인간관계는 나와 주님의 지금 관계일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