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이 나온다. 둘은 세상적으로 비교대상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이 실패한 여인이고, 시골에서 살림을 하면서 앞날이 막막한 그런 인물이다. 니고데모는 당시 국회의원이고, 야당(바리새파) 지도부였고, 성경지식에 있어서도 권위가 있던 인물이다. 둘은 예수님을 만났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고,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추파를 던지는 남자”로 알았다. 출발점이 이렇게 극명하게 대립하는데, 결말도 극적이다. 니고데모는 전혀 깨닫지 못했고, 사마리아 여인은 양동이를 버리고, 마을 사람 전체에게 복음을 전했다. 오늘에야 나는 성령의 역사라고 고백한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그 누구라도 함께 하신다. 그런데, 왜 니고데모는 바울과 동일한 조건,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주님을 향해 굴복하지 못했을까? 내가 니고데모처럼 안다는 그 지식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성령께서는 ‘안다는 사람’에게는 구제불능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미 알고 있다는 사람은 성령께서 아무리 알려주고 싶어도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수님조차 어떻게 해줄 없는 사람이 이런 사람인가보다. 반면, 세상이 버렸으나, 세상에서 실패했으나, 세상이 구제불능이라고 포기했으나,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서, 평소 자신이 궁금했던 성경적 질문을 던진다. 이 여인은 찾고 찾았던 사람이다. 설령 세상적으로 거듭 실패를 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오랫동안 구원에 대해 갈망하고, 찾았던 것이다. 허근영 목사님처럼 오랫동안 ‘구원의 예정론’에 대해 찾고 찾으면서 갈망하듯, 이 여인은 도대체 성전이 2개인데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진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전혀 다른 정답을 말씀하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성령과 예수님으로 예배하라! 나는 오랫동안 이 성경말씀을 알고 있었고, 예배할 때마다 나는 정말 이 말씀으로 예배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가! 그런데, 근본을 정말로 몰랐다. ‘진리’에 대해 몰랐고, ‘성령’에 대해서도 몰랐다. 부활을 알고서 이제는 명확하게 들어온다.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부활을 확증할 수 없다. 간혹,부활을 마음으로 확증할지라도 성령께서 하지 않으면 그것은 혼자 몸부림치는 슬픈 비애일 뿐이다. 예수님이 내 마음문을 두드리신다. 그러면 내가 마음 문을 열면 된다. “들어오소서! 주여! 내 마음의 주인이 되소서”라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내 마음의 주인은 여전히 나다. 그 이유는 내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내 마음 문을 연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 날마다 부활을 확증하는 것, 그것은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성령으로 내 마음문을 주님께 열어야 주님께서 들어오신다. 내 마음문을 여는 열쇠가 성령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성령께 간구하지 않으면 기도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열쇠가 성령께 있음을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두 사건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됐다. 두 사건에서는 “성령께서 행하셨다”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서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성령께서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사람은 부자청년, 니고데모, 가룟유다 등등 여러명이 등장한다. 부자청년은 문턱에서 돌아갔는데, 부자 삭개오는 주님을 영접했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찾고 찾는 마음이다. 세상평판과 명예와 부유함은 환경일 뿐이다. 모든 거지들이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유독 거지 바디매오가 주님을 만났다. 부활을 확증한 사람은 날마다 부활을 성령으로 확증하는 사람이다. 부활을 확증했다는 그 사건에서 멈추면, 그때부터 그것도 자기 경험이 된다. 날마다 성령을 의지함으로 부활을 간절히 붙들어야 ‘부활의 확증’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그 말씀은 날마다 성령과 부활을 통해서 살라는 말씀으로 내게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