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만나는 낯선 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보통 내가 여행을 계획하는 단계는 이렇다. 길을 걷다, 일을 하다, 대화 도중 기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불현듯 참을 수 없을 만큼 여행의 갈증을 느낀다. 일단 하던 일을 멈추고 약 5분간 최대한 이성적으로 갈증의 정도를 가늠해 본다. 해소되지 않으면 히스테리로 이어질 위험 단계의 상황이라면, 재빨리 다이어리나 모니터 우측 하단의 달력을 이용해 한달 이내 여행을 위한 가용 시간이 존재하는지 확인한다. 대게 이 단계의 끝은 악보의 도돌이표와 같아서, 좌절과 함께 해소되지 않은 갈증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히스테리와 함께 재분출되는 과정의 악순환으로 이어지는데, 이 단계를 통과하면 갈증은 기대감, 흥분감이 섞인 아드레날린으로 바뀌고 모든 것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된다.
그렇게 이탈리아행 비행기표를 끊고 일주일만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밤 11시 30분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두렵다. 낯선 타국의 냄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는 내가 남의 나라에 이방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한국인도 이탈리아인도 될 수 없는 아슬아슬한 경계의 불안한 신분, 여행자임을 너무도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내 이마에 주홍글씨로 여행자라는 단어가 써져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참으로 나약한 나는 이런 낯선 곳에 장장 12시간을 공중에 떠서 맛도 없는 기내식을 먹으며 날아온 스스로에게 도대체 여기 왜 있니? 라고 물으며 곧 후회하는 단계에 이르른다.
그렇다. 혼자 하는 여행은 스스로를 낯선 곳 두려운 곳으로 끝도 없이 밀어붙이는 과정이다. 도움을 바랄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권을 잃어버려서 국제미아가 되는 건 아닌지, 이탈리아 마피아 집단에 끌려가… (더 이상 상상하기도 싫다), IS가 내가 있는 곳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건 아닌지 등등 일어날 가능성 보다 안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은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을 스스륵 스쳐간다.
게다가 힘들기는 얼마나 힘든지. 하루 3-4시간 걷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사진과는 다른 호텔 방에 돌아가면 호텔 예약사이트를 고소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샌다. 먹어도 먹어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에 늘 배고프다. 간혹 길거리에서 취객이라도 만나면 내가 동양인에 여행자이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욕임이 분명한 이탈리아어를 한바가지 먹고도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끓어오르는 분을 삭힌다. 아… 나는 정말 여기에 왜 온 거란 말인가. 외롭다.
두려움. 외로움. 홀로 여행하는 여행자의 형체 없는 동행자다. 그래서 여행자라는 신분을 뒤집어 쓰면 나의 공간, 나의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던 용기와 자립심을 여행하는 동안만큼은 200% 발휘하겠다는 모종의 자기 각서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낯선 나. 여행의 순간순간 마다 낯선 나를 나는 마주하게 된다. 낯선 나란 아이는 약간의 자유 앞에서 더 많이 더 생생하게 말을 건다. 생각보다 용감하고, 뻔뻔하고, 의기소침하며, 친절하고, 감상적인 모습으로.
베네치아의 수상버스를 바라보며 알코올 알러지가 있는 내가 갑자기 싫어졌다. 와인의 산지 이탈리아에 와서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한다는 사실이 굴욕적이었다. 그래서 그 길로 자그마한 그러나 나름 동네에서는 유명한 듯한 Osteria(식당) 에 갔다. 플라스틱 컵 가득 따라주고도 1.5 유로밖에 하지 않는 너그러움에 기분 좋아진 나는, 안주 삼아 부르스케타를 먹으며 단숨에 와인 몇 모금을 넘겨 버렸다. 벌건 얼굴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Ciao 를 크게 외친 뒤 Osteira 를 나서 미술관으로 향했다. 티켓을 확인하던 관리인이 훅훅 올라오는 술 기운에 벌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미술관에서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고상하게, 엄숙하게 음미하듯 작품을 보지 않고, 생에 최고로 기분 좋게 내 마음대로 그림들을 훑었다.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 미술관이 내가 자주 가던 곳이라면, 누구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그런 행동들이 나를 아주 만족스럽게 했다. 그 누구보다 허례허식을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맞춰야만 했던 것들에서 자유로워진 나는 내가 원하는 것, 나의 본연의 모습대로 행동했다. 그것이 이탈이아에서 만난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자아성찰에 대한 수 많은 책, 학문, 명언들이 있지만 나는 여행이야말로 최고의 자아성찰 기회라 생각한다. 내가 그 모든 두려움, 외로움들을 감내하고도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나의 발자취를 남기는 곳마다 낯선 나, 새로운 내가 있고 그런 나를 발견하는 일상의 내가 있다.
아직 미완성의 자아를 가지고 있고, 더 나은 자아를 완성할 보다 많은 기회가 있는 나와 같은 청춘이라면, 지금이라도 어디든 떠나라 말해주고 싶다. 낯선 당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기쁨은 현재 내가 누리는 것을 잠깐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