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영조 푸른솔겨레연구소장의 ‘한국의 명문 종가’
재산을 가난과 구휼에 쓰고,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힘쓴 한국의 종가집을 찾아 밝힌 책이 나왔다.
한갈 김영조 푸른솔연구소장이 쓴 <나눔을 실천하는 한국의 명문종가>(얼레빗, 2015년 9월)은 나눔과 교육 그리고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22개 한국의 명문 종가를 찾아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먼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산다고 해 종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과 얼마나 나누고 살았는가가 명문 종가로서 평가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신적 베풂인 교육에서의 투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몸을 받치고 전 재산을 쏟아 부은 독립운동가의 종가가 진정한 종가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가난과 구휼에서의 나눔 정신, 정신적 교육사업의 투자, 독립운동 등 3가지 기준에 부합한 종가만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종가집 컬러 화보와 함께 자세한 설명을 곁들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난과 규휼 해결에 힘쓴 대표적인 종가로 세금을 대납하고 옥살이를 풀어준 해남 녹우당 고산 윤선도 종가, 흉년에 곳간을 모두 연 강릉 선교장 무경 이내번 종가, 전재산을 구휼과 의병에게 지원하고 차용증서를 모두 불태운 예천 별좌공 사고 이덕창 종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했던 경주 최부잣집 문파 최준 종가 등 14 곳을 소개하고 있다.
독립운동 및 교육 사업과 관련한 종가로 독립운동을 위해 전재산과 목숨을 바친 안동 임청각 석주 이상룡 종가, 사재 털어 교육 사업에 힘쓴 초가 종택 서천 청암 이하복 종가,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동학봉 김성일 종가, 상해임시정부 자금줄 역할을 했던 부산 백산 안희제 종가 등 8곳을 소개하고 있다.
“남파 박준경 선생(1857~1931)은 소작인들에게 소를 나눠주고 기르게 했다. 어려운 농민들에게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소를 먹이고 송아지를 낳게 해서 자립심을 기르도록 헀던 것이다. 한때 많을 때는 108여 소를 어려운 집안에 나눠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 중에서-
이는 가뭄 때 200석 내놓고, 50석은 종자를 심으라고 내놓은 나주 남파 박재규 종가에 대한 설명이다.
“안동에서 일제의 비위만 좀 맞추면 배부르게 살 수도 있었지만 백하 선생은 그 모든 것을 내동댕이진채 노구의 몸을 이끌고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를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다 이국땅에서(1914년 12월 10일 중국 삼원포) 쓸쓸히 눈을 감았다. 백하 선생의 무덤은 지금도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봐 비석을 세우지 않는 것이 도리어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중략)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은 백하 선생뿐이 아니다. 선생의 일가는 일제침략으로 온 가족이 희생되었는데 막내 동생 김락 선생은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찔러 장님으로 고생하다 죽었다. 또한 김구 선생과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백하 선생 아들 김형식도 손꼽히는 독립운동가다” -본분 중에서-
이는 안동에 동창학교를 세우고, 만주에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앞장선 안동 백하 김대락의 종가의 독립운동사를 말하고 있다.
백하 김대락의 종가인 백하 구려에는 백하 김대락 선생과 동생 여동생 김락, 조카, 증손까지 모두 6장의 건국훈장 애족장이 걸려있다.
가난 구휼에 앞장섰고 고종위 밀명으로 대한독립의군부 순무대장이 된 군산 돈헌 임병찬의 종가도 독립을 위해 노력한 종가이다. 돈헌은 1906년 전남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경술국치 후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고 전국적인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해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돼 거문도에 유배됐으며 고초를 겪던 중 순국했다.
이 책을 통해 프랑스 말 노블리스 오블리제(귀족들의 나눔의 베풂의 실천)의 정신이 우리나라 일부 종가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왜냐하면 종가라고 하면 흔히 고색창연한 기와의 부잣집이 생각난다. 종가라고 해 다 나눔과 베풂,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을 실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경현감 시절 본가에서 곡식을 날라 빈민구훌에 힘쓴 홍성 사운 조중세 종가는 1894년(고종 31년) 홍주 의병이 일어나자 239말의 곡식을 군량미로 아낌없이 내놓았다. 구한말 나라 정세에서 의병을 위해 선뜻 곳간의 빗장을 푼다는 것은 조중세 선생이 아니고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운 조중세 종가 고택 종손 조환웅 선생이 관람객들 향한 쓴소리는 눈여겨볼만하다. 고택의 외형보다 이어온 철학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택에 관람객들이 오면 관광지도 아닌데 대부분 집만 구경하고 갑니다. 사실은 이 종가가 이어오져 내려오기까지의 철학이 더 중요할 텐데도 말입니다. 오시는 분들이 외적인 문화보다는 내적인 문화를 체험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는 언제나 문을 열고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지요.” -본문 중에서-
저자 김영조 소장은 “화려한 고택 안에서 선조들의 명예와 부로 일궈낸 화단만을 만지작거리는 종가들도 있었다”며 “하지만 배고픈 이웃의 삶을 이해하고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던 진정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실천한 종가도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 김영조 푸른솔겨레연구소 소장은 지난 2004년부터 매일 편지글인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를 12년째 써 수많은 독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보내고 있다. 저서로 <하루하루가 잔치로세>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 <키질하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실까?>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기>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서울 문화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