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초콜릿을 ‘사랑’과 ‘아이디어’로 정의했다.
파도가 또 오는 군요. 그런 파도는 제게도 옵니다
3월 16일, 내 인생의 엄청난 사건을 결정한 날, 김성미 쇼콜라띠에를 만났다. 압구정 한복판, 햇살은 바람섞인 봄이었다. KBS, EBS, 동아일보 등등 언론사에서 조명한 그녀의 인터뷰를 시청했던 탓에 나는 초콜릿을 보면 그녀를 자주 그려보곤 했다. 13년전 34세, 결혼한 여인으로서 초콜릿에 빠져 유학을 결심한 열정의 예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초콜릿이 무엇인지, 뭣땜에 인생을 송두리째 해외에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인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기회는 시간을 타고 왔으므로, 궁궐같은 문을 열고 높게 올려진 계단을 오르는 내 기분은 뭐랄까, 하늘의 사다리를 오른다고나 할까? 성경속 야곱이 묘사한 그 하늘의 사다리처럼 나는 느껴졌다.
내가 만난 김성미 쇼콜라띠에는 맑은 웃음, 그리고 날카로운 통찰력, 정제된 언어 표현력이었다. 인터뷰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질문의 기회가 많지 않았으나, 쇼콜라띠에 교육 프로젝트에 대한 회의(會議)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초콜릿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어떠한지는 ‘향수’처럼 풍겼다.
내가 더욱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아는 초콜릿의 지식은 ‘아몬드 땅콩’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과자를 가장 좋아하고, 간혹 ‘가나 초콜릿’을 사먹거나, ‘핫쵸코’를 주문해서 마시는데, 그녀가 운영하는 ‘Pas de deux(빠드두_나와 너의 춤)’에서 얼핏 둘러본 초콜릿들은 ‘미술관’을 보는 듯 했다. 신데렐라 신발이 초콜릿으로 놓여 있으니 나는 침묵했다.
우리나라가 ‘고려청자’로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면, 유럽은 초콜릿으로 세계경제와 문화를 움직이고 있다. 김성미 쇼콜라띠에의 말이다. 고려청자는 흙으로 빗은 것이며, 초콜릿은 흙과 비슷한 재료로서 ‘먹는 초콜릿’과 ‘보는 초콜릿’으로 유럽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 역사가 400년이다.
김성미 쇼콜라띠에가 만약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400년동안 유럽문화의 전통을 가진 초콜릿의 예술적 가치를 간파할 수 있었을까? 그녀에게 ‘대한민국 1호 쇼콜라띠에’라는 대명사를 붙이는 이유는 ‘문화로서 초콜릿’을 한국에 가장 먼저, 혹은 가장 적극적으로 알렸기 때문이다. 한국 초콜릿 역사에 있어서 분기점은 2001년이며, 거기에는 그녀가 서있다. 2001년, 그녀가 강남에 ‘빠드두’를 오픈한 해이다.
“지금은 이미지 시대잖아요. 초콜릿은 상징성이 정말 좋아요. 사랑, 초콜릿하면 사랑, 연인, 달콤함, 부드러움을 누구나 떠올려요. 이 느낌은 전세계가 똑같아요. 초콜릿은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문화소통이예요. 초콜릿으로 가족끼리 예술작품을 만드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녀는 초콜릿을 ‘사랑’과 ‘아이디어’로 정의했다. 13년 넘게 초콜릿과 함께 살아온 인물이니, 초콜릿의 겉과 속을 또 얼마나 잘 알겠는가? 나는 그녀의 단어 표현력에서 ‘초콜릿의 매력’을 더욱 알게 됐다. 초콜릿을 사랑으로 정의하는 것은 알겠는데, ‘아이디어’로서 초콜릿을 정의하는 것은 정말 ‘신선’했다. 그녀는 초콜릿으로 ‘소설’까지 표현가능하다고 말했다.
“교육이 메뉴죠. 까페에서 음료수를 파는 것만 메뉴가 아니예요. 가르치는 것도 메뉴의 종류예요. 지금은 문화의 시대예요. 가족끼리, 연인끼리 뭔가 사연을 담을 수 있는 스토리가 필요한데, 초콜릿이 그 매개체가 될 수 있어요. 연인들이 함께 초콜릿으로 뭔가를 만든다면 그 시간이 바로 사랑이고, 그 작품이 영원한 추억으로 남는 것이죠”
KBS, EBS 등 유력 언론사에서 왜 그녀를 집중 조명하는지, 대화를 나누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초콜릿을 상품으로 정의할 때, 그녀는 사회학자답게 초콜릿을 ‘문화 아이콘’으로 정의한 것이다. 초콜릿을 통해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서 ‘쇼콜라띠에’라는 직업을 한국에 오픈했고, 핵가족화로 소외된 가족공동체를 위해서 ‘초콜릿 문화’를 전파한 것이다.
쇼콜라띠에에 대한 학교교육 프로젝트를 논의하는 중, 옆 테이블에 어떤 스터디 그룹이 들어와 열띤 토론을 벌인다. 대학생들인데, 초콜릿 스터디 그룹이다. 지구는 둥굴고, 한국에 없는 것이 유럽에는 존재하고, 유럽에 없는 것이 한국에 존재한다. 문화도 그러하고, 상품도 그러하다. 그것을 누가 먼저 아느냐에 따라 ‘정보의 주인’이 달라진다. 초콜릿에 대한 문화적 가치도 그러할 것 같다. 훗날 ‘한국 초콜릿 예술가들’이 ‘빠드두’에서 그렇게 커가고 있었다.
떠나고 싶지 않은 4층 궁궐같은 빠드두를 떠나면서, 하늘 사다리를 내려오는 기분은 뭐랄까? 왕의 파티에 참석한 신데렐라의 황홀함? 석양에 초록색 문을 닫는 그녀를 보면서, ‘초콜릿의 선구자’로서 고독함이 많이 느껴졌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 문은 더 늦게 열렸으리라. 앞으로 탄생할 초콜릿 예술가들은 ‘그녀의 이름’을 꼭 기억할 것 같다.
초콜릿으로 그녀를 기억하는 나처럼!!
“파도가 또 오는 군요. 그런 파도는 제게도 옵니다. 그대는 강기슭에 있고 저는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죠. 나는 내 자리에서 파도를 넘고 있을 테니 그대도 파도를 넘기고 오세요.”
– 김성미 쇼콜라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