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돌아보면, 여러번 기회가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재개발재건축’이다. 원래 기회는 에디코 과외전문회사에서 있었다. 내가 만약 에디코에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었다면 꽤 높은 직급으로 총망받는 교육전문가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언론인’이 되고싶은 열정과 ‘과외회사의 불규칙적 수입’에 대한 갈증이 나로 하여금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 언론을 시작으로 ‘코리아리포스트’라는 재개발재건축전문지에 입사하면서, 나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코리아리포스트는 ‘주택분야’에서 당시 최고의 전문지였다. 나는 부동산등기부등본을 읽을 줄도 몰랐다. 재건축재개발은 주택을 집단적으로 모아서 집을 짓는 것이니, 나로서는 ‘비전문가로서’ 주택전문지에 입사한 것이다. 다행히 당시 발행인이 나의 인상을 상당히 좋게 봤다. 나는 열정이 있었고, 소방방재신문이라고 꽤 좋은 언론에서 오라고 했지만 코리아리포스트에 입사했다. (나중에 보니, 소방방재신문은 네이버까지 진입했다.)
입사하고서 6개월은 정말로 힘들었다. 매일 나에게 재개발재건축에 대한 판결문을 해석해서 기사를 쓰라고 하는데, 전문용어가 무엇인지부터 너무 헤깔렸고, 제보가 들어와도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추진위원회와 재개발과 재건축’의 구분부터 힘들었다. 기사를 썼다고 하면, 언제나 잘못된 정보전달로 꾸중을 들었다. 당시로는 ‘재건축재개발업계’가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고, 어찌보면 나도 선구자적 입장이었다.
그래도 내가 8개월 가량 버텼더니, 그 분야에서는 베테랑 기자가 되었고, 비대위들과 조합을 양쪽에서 조명하는 객관적인 기사를 쓰면서 업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보에 대한 검증, 취재력, 사진촬영, 현장탐방, 인물탐방 등등 모든 기사작성을 깐깐한 데스크밑에서 배웠고, 나중엔 ‘청출어람’이 되었다. 편집국장은 본인이 잘된다싶으니까 밖으로 계속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수시로 바뀌는 법령을 연구하지 않았고, 어느날 내가 쓴 기사에 대해서 ‘시비’(是非)가 붙었다. 나는 정확한 팩트 위에서 기사를 작성한 것인데, 편집국장은 나에게 ‘틀렸다’는 잣대를 적용했고, 내가 판결문을 제시하자, 유구무언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생해서 배운 지식은 어디로 가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건축재개발업계를 2~3년동안 떠나있다가 매체비평 언론사에서 근무를 했었다. 그곳에서도 비대위들이 꾸준히 제보를 했고, 그때마다 단신 기사를 써줬더니, 감각이 죽지 않고 요즘도 기사를 작성할 때가 있다. 나는 거의 생활속에서 익숙하게 기사를 작성하는데, 일반인들에겐 정말로 생소한 내용들인 것 같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있다는 것은 귀한 정보다. 그처럼, 남들이 모르는 분야를 새롭게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다는 것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아주 피곤하게 배워야한다. 마치 ‘동굴속의 곰처럼’ 그렇다.
나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왔었다. 금융감독원 출입기자를 했던 때였다. 지금은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가 분리되었지만, 내가 출입기자로 활동했을 때는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가 함께 있었다. 금융위원회는 금융감독원을 관리감독하는 기관이고, 금융감독원은 모든 은행을 관리감독하는 기관이다. 둘은 함께 있으면 안되는데, 금융위원회가 ‘갑의 위치’인데, 건물은 금융감독원의 것이었다. 서로 묘한 ‘적과의 동침’과 비슷했다.
그곳에서 나는 하루에 10개의 기사를 작성했다. 물론, 금융지식은 아니었다. MBC KBS를 출입하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현장을 누비면서 생생한 기사를 취재해서 보도했다. 미디어펜에 근무했었는데, 편집국장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정말로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기사작성을 더 많이 했는데, 결국 그때 그 열정이 지금의 ‘집필력’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직장을 위해 헌신한 것 같았지만, 결국 나의 자신이고 나의 보물이 되었다. 기사를 보도자료를 카피하면 되지만, 스스로 취재원을 발굴하고, 보도자료를 분석해서 감춰진 정보를 탐색하고, 어떤 사건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칼럼을 작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다. 스스로 기사를 꾸준히 작성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가장 힘들었던 그 때가 바로 나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