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킹스맨 요원들이 정장을 입듯이, 이야기에 잘 어울릴 만큼의 액션을 입었다. 소년의 성장, SF의 신기술, 현대 사회의 이기심이라는 다양한 내용이 액션이라는 하나의 색깔로 맞물려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신없이 보고 나면 한 개의 질문이 남는다. ‘영화가 이래도 돼?’
이는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으나, 정통 영화라고 볼 순 없지만 만족스럽다는 감상의 반영이다. 매력요소 -해리와 에그시의 조합, 선명한 선악구도, 장우산, 수트- 는 영화를 본 사람이면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제쳐두고, 새로운 시각으로 킹스맨을 분석해보자. 킹스맨은 기존의 영화들과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를까.
킹스맨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세계인의 무책임, 자기 살길만 찾는 기득권의 이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진지하게 다뤘다면 어둡고 무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를 향한 일침을 품고 있으면서 깊이 파고들진 않는다. 화려한 화면으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선한 쪽도, 악한 쪽도 이야기 진행을 위한 최소한의 논리만 가지고 있다.
이 지점에 첫 번째 특징이 있다. 킹스맨은 관객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발렌타인이라는 갑부 악당이 존재한다, 주인공 일행은 세계 평화를 위해 발렌타인의 계획을 막는다, 끝. 발렌타인이 과거에 어떤 계기로 그런 신념을 갖게 되었는지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런 형태는 인물의 깊이감을 떨어트려서 정통 영화와 멀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동시에, 이야기 구조가 아주 명쾌해진다. 관객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대로 납득하면 된다. 쉬운 이야기가 주는 마음의 평화다.
킹스맨의 두 번째 특징은 잘 쓰인 액션이다. 액션은 이야기 구성요소라기 보다는, 갈등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일종의 장신구인 셈이다. 하지만 킹스맨은 액션을 단순한 장식이 아닌 호흡기로 쓴다. 랜슬롯 요원이 가젤의 칼날 의족에 반으로 쪼개지는 순간부터 에그시가 발렌타인의 벙커에 잠입하기 까지. 모든 극적인 상황에는 액션이 함께 한다. 쉽기 때문에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액션을 불어넣는다. 넣을 수 있는 데까지 가득.
세 번째는 감정이다. 킹스맨은 앞서 소개한 두 가지, ‘쉬운 이야기’와 ‘잘 쓰인 액션’을 이용해서 관객의 감정을 끌고 간다. 특정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갈등 상황에서 관객들이 느낄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데 중점을 둔다. 자기가 살겠다고 발버둥 치던 기득권들의 머리가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춰 날아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에서 나쁜 놈으로 정의된 무리를 피 튀기게 응징함으로서 영화 내내 -또 현실에서도- 억압 받았던 관객들의 감정을 풀어준다.
킹스맨은 기존의 영화들과 무게중심이 다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개연성, 논리를 버리고 보여주고 싶은 것을 끝까지 붙드는 처절함을 취했다. 이것이 잘못인가? 킹스맨 같은 작품이 영화 예술의 질을 떨어트리는가? 킹스맨을 본 사람이라면 선뜻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도 예술이기에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항상 균형을 잡아야 한다. 킹스맨은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그 대전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대중성을 끝까지 몰고 가도 개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작품 나름대로의 가치에 충실한, 잘 만든 영화다. 개성이 곧 예술성은 아니지만, 개성이 없는 예술성은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영화가 이래도 돼?’ 라는 말은 ‘예술이 이래도 돼?’라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은 무엇인가. 가벼워 보이는 B급 영화 킹스맨이 던지는 질문은 상당히 어렵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