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조명(照明)이 내 머리끝을 스쳐 지나가는 그 자리. 나와 벽에 걸려 있는 작품 간에 적당한 어색함이 머무르는 공간에서 나는 상당한 고독감(孤獨感)을 느낀다. 옆에 누가 있든 상관 없다. 작품 옆 덩그러니 놓여있는, 무의미한 하얀 표딱지를 – 과연 진심으로 관람객(觀覽客)이 볼 거라고 생각하고 붙여 놓았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 노려보며 나의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의 한계점에 임박(臨迫)해 간다.
작가. 작품명(도대체 왜?).
127.0cm X 183.0cm, 캔버스에 아크릴, 목탄(무엇으로 그렸는지, 이 점선면과 색채의 조합 덩어리가 얼마나 큰 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2013
그러다 참지 못하고 내 앞을 지나가는 또 다른 관람객을 피해 발길을 돌리며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밀려드는 허탈감(虛脫感)과 동시에 더 짙어지는 고독감. 나는 작가와 얘기를 나누는 데, 작품을 ‘이해’ 하는 데 실패했다.
예술(藝術)이란 게 원래 불친절(不親切)한 것이라 하지만, 요즘 내가 느끼는 현대미술은 불친절하다 못해 이따금 불편하다. 관람객과 소통하기를 포기한 듯한 요즘 작품들 중 어떤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냥 일상을 옮겨 놓은 것 같고, 어떤 것은 너무 심오(深奧)해서 관람객이 이해를 못하는 건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라 무의미한 건지 아리송할 만큼 어렵다. ‘발칙한 현대미술사’를 읽은 계기는 예술에 대한 나의 어려움을 당신만 그런 건 아니라며, 위로하듯 시작하는 책의 서문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람객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생경(生硬)한 작품과 마주했을 때 ‘이해’라는 난관(難關)에 봉착(逢着)한다. 저명한 화상, 일류 학술 기관이나 박물관의 큐레이터도 예외는 아니다… (중략) …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영국 테이트 갤러리의 관장 니컬러스 세로타 경 조차 이따금 어쩔 줄 모르겠다고 할 때가 있다. 한번은 작업실에서 어떤 신작을 보자마자 살짝 ‘주눅 들었다’고 나한테 고백하기도 했다. “아무 생각도 안 날 때가 많다네. 기가 죽기도 하고.” 현대미술계에서 세계적 권위를 지닌 사람도 이럴진대, 나머지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나?
작가 윌 곰버츠는 런던 테이트 모던 디렉터로, BBC 아트 에디터로 일하며 본인도 조금씩 현대미술을 ‘이해’ 하기 위해 필요한 안목(眼目)과 자신감을 얻었고, 미술관을 어렵게 느끼는 독자들을 돕기 위해 인상주의(印象主義)부터 150년에 걸친 미술사와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기본을 담은 글을 썼다고 밝혔다.
“예술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주제라는 점에서 일종의 게임과도 같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대상도 기본적인 규칙과 규정을 알고 나면 한결 쉽게 다가갈 수 있다.”(Chosun Biz Book Club, 윌 곰퍼츠 인터뷰 중)
실제로 책을 폈을 때 가장 인상(印象) 깊은 페이지는 현대 미술의 연혁(沿革)을 런던 지하철 노선도로 표현해 놓은 Key to Modern Art Movements 인데, 각각의 시대별로 유명한 작가들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되어 있어 이제 막 미술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꽤나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하나의 표만으로도 “인상파하면 드가, 모네 등등 많지만 그래도 세잔이지.” 라고 뽐 낼 수 있을 법한.
안의 내용은 더욱 알차다. 현대 미술사를 시계열 순으로 나열하면서도 주요 작가의 개인사부터 상업적 가치로서의 예술,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간의 경계 등 다양한 주제를 가벼우면서도 솔직하게 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나의 경우엔, 해외 여행을 가면 꼭 그 나라의 미술관을 적어도 한두 개는 둘러보는데, 최근 몇 번의 여행에는 이 책을 들고 가기도, 여행 가기 전날 밤 다시 들춰 보기도 할 만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 책 한 권만으로 현대미술을 모조리 이해하긴 어렵다. 당연히 관심 있는 작가나 시대가 있다면 보다 깊이 있는 책을 읽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기엔 이만한 책이 없는 것 같다. 현대 미술의 교과서는 아니지만, 좋은 문제 풀이집이랄까?
만약 미술관을 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려워서 주저하는 당신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저자 윌 곰퍼츠 Will Gompertz는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영국 테이트 갤러리 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BBC에서 아트 에디터로 활동하며 미술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약 중이다. 테이트 갤러리에서 일하는 동안 대중에게 현대미술을 보다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 현대미술에 대한 코미디쇼를 직접 제작해 국제적 예술행사인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미술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과 역량을 인정받아 BBC 아트 에디터로 발탁되며 또 한 번 화제를 일으켰다. (출처: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