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박근영 칼럼니스트]
조조영화보다는 심야영화다.
전날 밤을 새고 보는 조조는 다르겠지만, 아침, 하루의 시작이 주는 특유의 쾌활함과 상큼함이 뒤섞인 아침의 영화는 어수선하다. 반면, 맥주 한 캔과 함께 잠 드는 일 외에는 뒤에 뭐가 없는 그런 늦은 밤의 영화관은 우주처럼 고요하다. 그런 새까만 진공 상태에서는 영화가 이끄는 대로 내 눈, 내 귀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성까지 오롯이 내어줄 수 있다. 혼자 본다면 더더욱.
싱 스트리트(Sing Street, 2016)는 내 취향저격이었다. 너무 독립영화 스러운 건 딱히 마이너급 인물은 아닌지라 부담스럽고, 너무 상업영화 스러운 건 주류의 감성에는 편승하기 어려운 특유의 똘끼 때문에 공감이 안 된다. 그 애매한 중간에 있는 영화가 바로 ‘싱 스트리트’였다. 거기에 원스, 비긴어게인의 존 카니 감독이 제작한 비슷한 음악영화라니 비슷한 시간대에 엄청난 대작이 있지 않는 한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원스가 그랬듯이 영화 내용은 참 별 게 없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주인공과 모델로 성공하고 싶지만 현실은 지평선 너머 닿을 듯한 거리의 휘황찬란 런던이 아닌 우울함 가득한 더블린 촌구석에 머물고 있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꿈을 찾아 나가는 청소년의 성장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감독의 연출이 뛰어나다. 질풍노도 주인공들의 불완전한 심리를 담은 거칠거칠한 영상이 그랬고, 어설픈 뮤직비디오는 사실 전혀 어설프지 않았다.
내게 감독의 전작들과 ‘싱 스트리트’가 어떻게 다르냐고 묻기에 “덜 세련됐다. 그런데 괜찮다.” 라고 답했다. 만약 ‘싱 스트리트’가 원스나 비긴어게인처럼 물 흐르듯 잔잔하고, 안정감 있고, 따뜻한 세련된 영상으로 가득했다면 관객들은 아마 주인공의 펑키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보며 박장대소하지 못하고, 불편한 이질감에 청소년 성장드라마가 아니라 청소년 반항드라마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주제에 딱 맞는 연출이었다. 어색하고, 촌스럽고, 불안정하다.
거기에 주인공과는 다르게 어른으로 대변되는 주인공의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그리고 어른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형을 통해 단순히 ‘꿈’ 이 아니라 ‘꿈을 꾼다’ 라는 게 무엇인지 인물들을 대비하며 상당히 체계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전달한다.
그렇게 영화는 클로징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 클로징 또한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괜찮았다. 주인공과 여자친구는 결국 배를 타고 폭풍우가 넘실대는 바다에 얼굴을 연신 때려대는 비를 맞으면서도 웃으며 건넌다. 비싸고 안전한 비행기가 아닌, 지붕도 없는 모터배를 타고 위험천만한 바다를 건너면서도 좋다고 웃는다.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암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해볼 만한 용기가 있어 행복하다는.
영화 내내 깔리는 귀가 즐거운 노래들 중 마룬 파이브 애덤 리바인의 엔딩 크레딧 노래 ‘Go Now’의 가사를 적어보며, 글을 마친다.
[ Go Now ]
자, 이렇게 우리 삶에 기회가 왔어.
너도 원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분명히 보일 거야.
점점 더 선명히.
어서, 실수해도 좋아.
내일은 잘 해낼 테니까.
앉아서 얘기만 하지마.
시간만 가고 있잖아.
당당히 맞서 뒤돌아 보지마.
이미 멀리 왔는걸.
이제 멈출 수도 없어.
네 눈으로 앞만 봐.
네 삶을 위해 달려.
결심해 버리고 뒤돌아보지 마.
과거는 무너져 내렸어.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잖아.
그거면 충분해.
계속, 계속해 찾아내.
네가 알고 있는 진실을.
계속, 계속 멈추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
지금 가지 않으면 절대 못 가니까.
지금 알아내지 못하면 절대 모를 테니까.
절대 돌아오지마.
절대 돌아서지마.
지금 가지 않으면 절대 못 가니까.
지금 가지 않으면 절대 못 가니까.
지금 알아내지 못하면 절대 모를 테니까.
절대 돌아오지마.
절대 돌아서지마.
지금 가지 않으면 절대 못 가니까.
지금 가지 않으면 절대 못 가니까.
지금 알아내지 못하면 절대 모를 테니까.
절대 돌아오지마.
절대 돌아서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