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자 : 이태림
취재장소 : 덕수궁
문화재 소개 :
창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됨.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시어소(時御所)’로 정하여 행궁(行宮)으로 삼아 덕수궁(경운궁)을 창건함.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됨.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함.
대한제국시대, 일제시대의 덕수궁
고종은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고, 마침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됨.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시작됨.
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큰 시련을 겪음. 일제는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경운궁에서 즉위시킴. 황제에 오른 순종은 그 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으며, 이것이 궁궐로써 경운궁의 마지막임.
한국의 보물로 선정한 이유 :
덕수궁은 경복궁만큼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곳이 아니지만, 밤에 가면 고요하고 조용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고요함 속에 잔잔히 퍼져있는 역사를 찾을 수 있다. 아관파천을 하고 돌아온 고종이 머물렀던 거처이자, 대한제국의 시작을 함께하고 또 일제강점기를 다 지켜보았던 건물인 만큼 곳곳에 숨은 우리의 역사를 되새겨볼 수 있다. 또한, 옛 양식과 서양의 양식이 합쳐진 고궁으로 동,서양의 느낌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최근 덕수궁 야외 프로젝트로 빛, 소리, 풍경이라는 전시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시를 통해 사람들이 덕수궁에 더 관심을 갖게 하고 옛 것으로 여겨 멀리하지 않고 현대적인 감성을 더해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의 것을 잊혀 지지 않게 하는 노력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 긍정적인 사회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문화재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중화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여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어 사용함.
밤에 조명을 받아 처마의 곡선이 더욱 빛이 났다. 균형과 부드러움을 자아낸 전통적인 건물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덕홍전
덕홍전의 천장의 문양이 신기했다. 전통색인 오방색을 사용하면서도 섬세한 문양이 한국적인 미를 극대화시키는 듯 했다.
정광헌
동서양 양식을 모두 갖춘 정관헌은
고종이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
서양건물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건물의 모습도 아니어서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연회를 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연회를 여는 곳이 맞고, 당시 연회를 연 모습이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었다.
석조전
석조전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사용함.
고궁 속 서양적인 구조의 건물이 눈에 띄었고, 전통적인 건물은 아니지만 역사를 간직한 만큼 기품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