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죽고, 안식일이 지난, 첫날에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렇게 세 여인이 향품을 들고 예수님 무덤을 찾아갔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매우 일찍, 해돋을 때 도착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사랑했으면, 두려움의 벽도 뚫고 돌진했을까? 목숨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것이 이런 것일까? 무덤 앞에 돌이 있으니, 남자가 나타나 치워주면 좋겠다고 그들이 생각했는데, 가서 보니, 돌이 이미 사라졌다. 시체도굴로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총알처럼 날아왔다. 무덤에 들어갔더니,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천사다. 이 또한 예상 밖의 사건이다. 그가 말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무덤속에서 주님이 살아나셨다. 인생이 무덤에 갇힐 때, 주님이 나타나 말씀하신다. “네가 이제 살아났고, 더이상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었던 곳이 다시 살아나는 곳이다. 무덤에서 생명이 탄생한다.
이어 천사가 명령한다.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 예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기쁨의 소식은 두려움 가운데 임한다. 여자들은 몹시 놀라고 떨며, 무덤에서 도망쳤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이 벙어리가 되고,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대괄호가 열리고, 새로운 문서가 첨부됐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마가복음의 증보판일 것이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몸을 먼저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일이다. 마리아가 이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 진리에 대한 귀머거리다. 시골로 가는 두 사람에게 예수님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그들도 부활의 소식을 전했으나, 제자들이 역시 믿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 믿음없음과 완악함을 크게 책망하셨다. 책망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그 증언이 곧 부활복음이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아멘!! 이 보다 놀라운 소식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는 이와 같다.
1. 복음을 전파하라!
2.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
3.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잡고,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을 것이다.
이러한 표적이 나타나는 것은 성도의 능력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없음! 곧 사람의 믿음없음이 믿음으로 바뀌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한 것이다.
절망속에서 희망이 샘솟는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찬양한 이유는 그곳에서 진실한 소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울의 추격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갔다. 추격하는 사울을 본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절망속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덕분이다. 세상 모든 권세를 가졌어도 예수님을 잃으면, 그 영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담이 잠들매, 그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 나의 죽음은 새로운 창조를 향한 밑바탕이다. 죽음은 곧 부활의 문을 연 것이다. 죽음으로 부활의 문이 열린다. 절망이 없다면 소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