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영 칼럼니스트,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서평]
내가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는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다. 먼 기억 속 흐릿하게 남아있는 책을 읽는 내 모습, 그 느낌들을 간신히 복기해보면 초등학교 1, 2학년 때 쯤 이었을 것 같다. 그 무렵 즈음, 밤 늦게 퇴근한 어머니가 책 한 권을 들고 오셨다. 아마 혼자 놀고 있을 딸아이를 생각해서 퇴근 길 지하철 가판대 또는 회사 근처 서점 어딘가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 있는 여러 책 중 하나를 집어 오셨겠지 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본다. 어쩐지 아련한.
이 책은 뭐랄까. 엉덩이에 난 몽고반점 같다. 보통 서서히 흐릿해지다 4~5세 사이 유년기가 되면 사라지는, 내가 순수한 존재로 태어난 적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그런 징표 같은 것. 드물지만 성인이 된 후에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난 이 책을 떠올릴 때마다 사라진 몽고반점이 다시 올라오는 것만 같아 엉덩이가 간질간질 하다.
조제 마우루 지 바스콘 이라는, 상당히 생소하고도 긴 이름의, 브라질 작가가 1968년 출간한 이 책은 아동문학의 고전과 같아 이미 여러 매스컴을 통해 소개 되기도 하였지만, 고전이 그렇듯 책의 아름다움과 가치는 언제 어느때 다시 논해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실직자 아버지, 공장 노동자 어머니, 누나, 형, 동생과 지독히 가난한 가정에서 말썽꾸러기로 구박 받는 5살 제제가, 그와 동일시 되는 친구 라임 오렌지 나무(밍기뉴)와 그의 순수함을 지켜주는 친구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 뽀르뚜까와 우정을 나누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책을 읽다보면 제제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며 왠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도. 초등학생 나도.
어릴 때 외조모부 손에 자란 나는 늘 외로웠던 것 같다. 함께 놀 형제도 없던 나는 조용하고 착하게 구는 아이였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여 어린 나이에도 외로움이란 게 무언지 알고 있었다. 잠들기 전 바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부모님을 껴안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며,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제제는 나였고, 그 아이가 슬프면 나도 슬펐다. 제제가 혼자만의 세계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나와 너무나도 닮아 혼란스러웠다.
제제와 내가 깨끗한 어린 아이였기에 가질 수 있었던 동심, 상상력은 친구 밍기뉴를 만나게 했고, 우리는 함께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의 사람들, 어른들에 대해 둘만의 속삭임이지만 강하게 토로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런 어른이 될 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생각을 하며 서글퍼했다.
“나무야, 한 가지만 물어볼께. 누구든지 너와 말할 수 있니?”
“아니야, 제제. 너하고 뿐이야.”
“정말이니?”
“맹세할 수 있어. 어떤 요정이 나에게 너와 같이 조그만 아이의 친구가 되면 말을 하게 되고 또 행복해지게 된다고 말했어.”
그 중 유일하게 우리를 이해해주던 뽀르뚜까는 현실 세계에 있지만 동심의 세계가 얼마나 갸냘프고, 소중한 세계인지 알고 지켜주려 했던 어른 친구였다. 그런 뽀르뚜까가 지금도 그립다면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걸까? 아니면 현실의 세계에 머물곤 있지만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사랑하는 마누엘 발라더리스 씨,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마흔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리움 속에서 어린 시절이 계속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언제라도 당신이 나타나셔서 제게 그림 딱지와 구슬을 주실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나의 사랑하는 뽀르뚜가, 제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구슬과 그림 딱지를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제 안의 사랑에 만족하기도 하지만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절망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시절, 우리들만의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먼 옛날 한 바보 왕자가 제단 앞에 엎드려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뽀르뚜가, 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영원히 안녕히!
바라고 믿건데, 나를 포함한 이제는 어른이 된 우리는 때로 너무 차가워 시리기까지 한 삶을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여리고 가냘픈 어린아이의 세계를 나와야만 했지만, 어린아이의 그 순수한 마음에 대한 동경만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지나온 그리고 때로 포기해야 했던.
아쉽지만 제제의 나에게는 안녕을, 그리고 이제 제제는 될 수 없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뽀르뚜가가 되어 또 다른 제제를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따금 희미하게 떠오르는 몽고반점이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기억하며.
*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포르투갈어: Meu Pé de Laranja Lima)는 브라질 작가 조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루스가 1968년 발표한 소설이다. 간행 당시 유례없는 판매기록을 세웠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브라질 초등학교 강독 교재로 사용됐고 미국 유럽 등에서도 널리 번역, 소개되었으며 전 세계 19개국에서 32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국내에서는 1978년 발간됐지만 처음엔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독자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면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고 지금까지 300만부 이상 팔렸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이후에 ‘호징냐, 나의 쪽배’, ‘광란자’, ‘햇빛사냥’이 연달아 출간되었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