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은 : 문화리더(인수중1)
탐방일자 : 2015. 11. 15.
탐방한 곳 : 창경궁
취재 내용
지난 11월 15일 일요일에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의 궁궐인 창경궁에 갔다. 창경궁은 본래 궁궐의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창경궁터에 있던 고려시대 궁궐)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다른 궁과 비교해 보았을 때 다른 점들이 많다. 그래서 창경궁은 어떤 특징과 역사를 지니고 있을지 조사해 보았다.
우선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로 작은아버지인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13세로 나이가 어려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으로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 비 안순왕후 등 세 분 대비를 모시게 된 성종이 아들을 위해 마련한 궁궐이다. 그럼 창경궁에만 있는 보물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창경궁에는 팔각칠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조선 성조 원년에 중국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할 때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 이라고 한다. 이 석탑의 기단은 사각형의 받침돌과 팔각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그 위의 팔각형의 단면의 꽃무늬는 아름답고 화려하기까지 하다.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공주 마곡사 석탑과 비교되는 라마탑을 연상케 한다.
또 창경궁에서 유명한 것이 있는데 바로 창경궁 대온실이다. 흔히 말하는 식물원인데, 1909년에 건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 구조와 유리, 목재가 혼합된 건축물이다. 창경궁 식물원은 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킨 뒤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지은 것이다.
그 다음으로 창경궁에는 풍기대가 있다. 이는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풍기대구멍에 깃대를 달아놓고 그 위에 깃대를 달아놓은 것이다. 팔각기둥에 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긴 것이 인상 깊었다.
창경궁의 또 다른 보물은 바로 성종태실과 태실비 이다. 태실은 왕자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고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는데 1923년 조선왕실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창경궁 안에 있는 관천대는 1688년(숙종 14) 영의정 남구만이 창덕궁 금호문밖에 축조한 것이다. 한가운데 네모난 돌을 놓아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 관측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한다. 계단과 난간만으로 구성한 간결한 것이 힘찬 조형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외에도 창경궁에는 다른 궁보다는 작았지만 평지가 아닌 언덕길 도 있고 작은 처소들이 많았고 춘당지라는 연못이 두 개나 있다. 또한 어느 궁에서 볼 수 없었던 흰색의 소나무인 백송도 볼 수 있었다
느낀 점
저번에 썼던 경복궁의 비밀을 이어 창경궁에 관해 기사를 쓰다 보니 서로 같은 궁이지만 다른 점이 많구나 라고 느꼈다. 이번 기사를 쓰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창경궁이 1909년부터 1984년 까지 동물원으로 창경원이라 불리웠다는 것이다. 또한 궁에 일본의 나무인 벚꽃나무를 심기시작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제 시대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왕실의 역사와 얼을 말살하고 조선 왕조를 멸시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한다.
가슴 저 아래에서 뜨거운 분노가 올라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궁을 거닐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한가롭고 편안하게 가을 날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옛날 이 길을 걸었을 조선의 왕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먼 미래에 과거를 생각해보는 후손을 생각해보았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이 아름다운 궁을 행복하게 걸을 수 있게 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