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요즘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같은 생각은 내가 가진 생각이니, 내 생각과 다른 동전의 뒷면을 가진 색깔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몇해 전에는 나와 다른 생각은 ‘틀린 생각’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이미 판단하고, 나도 모르게 코딩이 되어서 경계하고, 배제하는 습관을 가졌다. 요즘도 그런 인식의 습관이 있지만, 스스로 나와 다른 남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다짐하면서, 경청의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덕분에 나는 나와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 즉 나의 말에 토(吐)를 달거나, 반대의견을 제시할 때, 관심을 둔다. “왜요?”라고 그 이유를 진심으로 물어본다. 옛날에는 “왜!!”라고 했던 것이 지금은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변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나도 틀릴 수 있음”에 대한 성찰과 자기반성이다.
인식의 오류는 사람의 머리가 블랙박스로 되어 있어서(사람은 물체를 보고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뇌의 인식과정은 철저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음.) 주의깊게 상대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정의를 위하여”라고 깃발을 높이지만,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분열되듯 그러하다. 누가 옳을까, 그것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의(正義)는 무엇인가’의 논제가 정의(定意)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토론, 다른 말로 대화(對話)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언어는 특히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문화가 깊게 숨겨져 있어서, 토론문화에 적합하다. 나의 토론은 마음의 소통이며, 상대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나, 상대의 의견을 이해하는 것이나 결국 동일한 대화효과를 갖게 되지만, 의견표현의 주된 목적은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이므로, 대화의 무게중심은 전달과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기’보다 경청하기가 중요한 것이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 현상에 대해서 오랫동안 상대의 인지능력 부족으로 생각했지만, 요즘은 정반대다. 나의 표현능력 부족탓으로 돌리고, 어떻게 하면 나의 생각을 상대가 이해하도록 표현하고, 매체효과를 일으킬까, 고민한다. 나의 생각이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어떻게 해야하는가?
“기립하세요!!!”
3번이나 “기립하세요!!” 했지만,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두리번거렸다. ‘기립’의 단어를 몰랐던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기립’은 ‘기린’인지 혹은 ‘기럭’인지 알 수가 없다.
“모두 일어나 주세요”라고 하니, 벌떡 일어났다. 단어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던 순간이다.
나에게 토론(討論)은 2가지다. 하나는 상대의 말을 상대의 입장에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 다른 하나는 상대가 나의 말을 나의 입장에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토론(討論)에서 토(討)는 보통 토벌(討伐)하다는 의미로 인식된다. 토론이 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토(討)는 말씀 언(言)과 마디 촌(寸)으로 되어있다. 어디에 토벌의 뜻이 있고, 어디에 칼이 있는가? 손찌검으로 상대를 때린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촌(寸)은 손찌검의 뜻이 아니다. 한자에서 손은 나눔의 의미가 강하다. 八이 사람의 팔을 본떴고, 의미도 나눌 팔, 여덟 팔의 뜻이다. 손은 때림이 아니고, 나눔이다. 준다는 뜻으로 부(付)도 사람과 마디 촌(寸)이 합쳐져서, ‘준다’는 뜻이 되었다. 寸은 열 십(十)과 점이 합쳐졌는데, 두 손으로 해석해도 된다. 십(十)은 두 손을 합쳐놓은 모양으로서, 열손가락을 뜻한다.
토(討)는 군사적 용어로서 두 손을 들어서 명령하다는 의미로 ‘치다’는 뜻이고, 일상생활에서는 손짓을 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토론과 대화에서 몸짓언어가 정말로 중요하다. 손짓과 표정은 곧 몸짓언어다. 언어자체에 말투도 중요하지만, 손짓과 몸짓도 언어다. 말을 하다가 핸드폰을 쳐다보면, 상대방은 그것을 ‘무관심의 언어’로 인식한다. 시계만 쳐다봐도 상대방은 “다른 약속”으로 받아드린다. 무언의 행동이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토(討)가 바로 몸짓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론(論)은 말할 론(論)인데, 말씀 언(言)과 둥글 륜(侖)의 합성이다. 둥글 륜(侖)은 책 책(冊)과 모을 집(亼)이 합쳐졌다. ‘스’처럼 생긴 ‘亼’은 ‘모으다’는 뜻이 있다. 선분 3개가 모여서 삼각형이 되었으니, 모으다는 뜻이다. 侖은 책을 모은다는 의미로서, 옛날 책은 대나무 죽간으로 되어있었다. 지금은 책이 종이로 되어있지만, 죽간책은 둥글게 말아야 했고, 그 분량은 상당히 많았다. 侖은 죽간들을 엮어서 돌돌돌 말았다는 뜻이다. 侖은 둥글게 말아놓은 1권의 책이다. 둥글게(侖) 말한다(言)는 것은 원탁토론에서 모두 돌아가면서 말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토론은 토의하고 논의하는 것이다. 재료는 의견이며,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각 맞추는 것이다. 토벌하듯 의견과 의견으로 싸움을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의견과 상대의 의견을 서로 결합해서 정반합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언어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