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내가 달팽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와 많이 닮아서다. 딸기를 먹고 운명을 달리한 첫 달팽이가 꼭 배당을 멘 내 모습과 흡사했는데, 나의 관리부족으로 생(生)을 마감해서 안타까울 뿐이고, 배낭없이 살아가는 민달팽이는 속도가 제법 빠르다. 배낭멘 달팽이는 속도면에서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둘은 서로 다르면서도 친밀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민달팽이 큰 것과 작은 것이 잘 자라고 있다.
오늘은 달팽이가 새벽일찍 일어나서 창문쪽 잎사귀로 몸을 움직인다. 어제 배추잎과 상추잎을 새롭게 사서 1장씩 뜯어서 유리병에 담아 줬더니 먹을 것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서 밤새 배가 불러 몸집이 불어났다. 달팽이는 더듬이가 4개다. 2개의 달팽이는 앞쪽을 탐지하고 나머지 밑의 2개는 아무래도 밥먹는 이빨이라는 생각이 든다. 달팽이가 더듬이를 숨기고서 제자리에서 한참동안 옴지락 옴지락 거렸다. 가지도 않으면서 제자리에서 잠들지도 않으면서 계속 혼자 뭔가를 한다.
자세히 접근해서 눈을 부릎 뜨고 보니, 꼭 밥먹는 모습이다. 토끼와 사슴같은 초식 동물은 잎을 입에 넣는 모습이 보이니까 밥을 먹어서 배가 부르겠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달팽이는 입속에 잎이 들어가는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단지 상추에 구멍이 생겼고, 배추가 군데군데 찢긴 모습에서 달팽이의 식성(食性)이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런데 직접 달팽이가 밥먹는 모습을 목격할 줄이야. 기어다니는 것도 신기한데 밥먹는 모습도 참으로 독특하다. 많이 먹지도 않는다. 그저 한귀퉁이만 먹는데도 몇분이 걸린다. 먹는 것 같지 않지만 그 몸집에 그 정도 먹었다면 대식가(大食家)이다. 사람도 밥을 먹을 때는 1/100의 크기의 밥을 먹게 된다. 달팽이의 몸집에서 자신의 1/100의 크기정도면 정말로 작은데, 내가 볼 때는 그것보다 더 많이 먹는다는 느낌이다. 배가 부른 듯 달팽이는 슬금슬금 일어나서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다시 내려간다. 달팽이는 결코 정상에 안주하지 않는다. 올라가는 목적도 어딘가로 내려가기 위해서다. 내가 여러번 시험을 해봤다. 나뭇잎 위에 올려놓으면 달팽이는 반드시 나뭇잎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고,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달팽이는 줄기를 타고 내려와서 나무 밑둥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한다. 이번에 사온 나뭇잎은 상당히 크고 줄기가 좁아서 달팽이의 더듬이가 출구를 찾기가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번은 달팽이가 그 잎새 위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듯이 뛰어 내렸다. 그 끈적거림을 줄로 메달아서 서서히 떨어져서 아래 나뭇잎으로 무사히 안착해 잠이 든다. 이렇듯 달팽이는 낮은 곳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습지’(濕地)라고 부른다. 인문학적 단어로는 ‘고독’(孤獨)이다.
고독의 여정은 늘 새로움을 선물한다. 야곱은 어머니의 권유로 아버지 이삭의 축복기도를 형 에서 대신에 받았다. 분명 형이 받기로 했던 축복기도였는데, 어머니가 동생 야곱에게 정보를 주고, 식사까지 챙겨주면서 야곱이 간발의 차이로 축복기도를 먼저 받게 되었다. 동계올림픽으로 말하면 금메달을 딴 것이다. 그리고 어떤 축복이 올 줄 알았는데 형 에서가 겁박과 협박으로 살해도구를 갈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축복기도를 강탈당했다고 알게 된 형 에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축복기도가 오히려 화가 된 것으로 판단한 어머니 리브가와 아버지 이삭은 동생을 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난시킨 내용이 성경 창세기에 나온다. 복이 화가 된 듯 했으나, 그 사건의 내몰림으로 야곱은 비로소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이삭의 축복기도가 그 순간의 물질의 상속이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이삭의 재산은 오히려 에서가 물려받았다. 혈통적 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의 하나님이 곧 야곱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였다. 그래서 야곱이 가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외롭고 쓸쓸한 광야길에서 야곱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는 성경 내용이 있다. 고독은 곧 새로운 만남으로 나아가는 여정과 같다. 야곱은 그러한 새로운 여정을 통해서 라반 삼촌의 집에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집에서 쫓겨나 도망자 신세가 된 줄 알았으나, 축복이 저주가 된 줄 알았으나 그러한 상황의 전환으로 하나님은 새로운 무대에서 더 좋은 것을 주셨던 것이다. 고독은 곧 현재의 상실로 나타날 수도 있고, 원하던 것이 멀어지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나와 하나님이 함께 하느냐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월급을 주지 않는 라반의 집에서도 야곱이 번창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문명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간 롯이 모든 재산을 잃듯이 그렇게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느냐가 모든 번영의 근본이고 원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달팽이처럼 나의 위치로 낮아진다. 낮은 곳은 곧 나의 위치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의 위치는 곧 삼위(三位)로 맺어진 존재 위치임을 겸허히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