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새벽부터 행방불명된 달팽이를 찾겠다고 1시간을 헤맨다. 화분위에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기억을 더듬어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분명 먹을 거리로 상추잎을 새롭게 갈아주고 달팽이의 존재를 확인했는데 화분 곳곳을 찾아봐도 존재가 사라졌다. 두더쥐처럼 땅속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사실상 아니다. 단지, 달팽이가 동그랗게 흙알을 꺼내놓은 것이 이상했다. 보통 달팽이는 푸른 색 똥을 싸는데 이번에는 엄청나게 많은 흙알을 작게 쌓아놓았다. 꼭 개미가 무슨 집을 짓겠다는 것처럼,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사건을 마주했다.
큰 달팽이를 키울 때는 어렵지 않았다. 단지 그릇속에 넣어놓고서 달팽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확인할 수 있어서 걱정이 없었다. 화분을 사오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상추잎과 배추잎을 주는 번거러움이 사라진 대신에 달팽이와 숨박꼭질을 해야만 한다. 큰 달팽이는 몸집이 커서 대략 숨는 장소가 정해져 있다. 유리병 밑이나 나뭇잎 뒤쪽이다. 영락없다. 그런데 작은 달팽이는 몸집이 작아서 흙더미속에 몰래 숨어 있으면 불을 켜고 찾아도 알 수가 없다. 나뭇잎마다 앞면 뒷면 확인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번번히 나는 술래를 맡아야 했다. 오늘 아침엔 결국 작은 달팽이가 어딘가 사라졌다고 결론을 내리고, 어제 버린 그 상추잎을 수소문해야하나, 혼자 곰곰이 생각하고 화분을 내려놨는데 글쎄 화분 밑에서 빼꼼히 나를 쳐다보는 달팽이 더듬이라니…. 잃어버린 양한마리의 성경구절이 내겐 잃어버린 달팽이로 다가왔다. 어찌나 반갑던지 그 달팽이의 더듬이는 아무래도 두 손으로 반갑다는 표시같다. 아!! 그리운 누군가 내게 다시 오려나?
오늘은 큰 달팽이에게 큰 숙제를 내줬다. 나뭇잎 위쪽에 홀로 남겨두고 내려오기 운동이다. 번번히 큰 나뭇잎 위에서는 내려오지 못하고 줄타기를 하거나 내 도움을 받고서 줄기를 찾았다. 이번에는 돕지 않고 혼자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웬걸, 내가 큰 나뭇잎에 달팽이를 올려놓자 이 녀석은 내 마음이라도 아는 듯 총총총 걸어가듯 기어가더니 금새 줄기를 찾아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려 웅크린다. 어찌나 귀엽던지 강아지같다. 실력껏 살때까지 살아보라고 나는 작은 상추잎을 담요삼아 달팽이를 덮어주었다.
작은 달팽이를 찾아서 반갑기도 하고, 이제는 혼자서 웅크리기 보다는 나뭇잎위에서 운동도 하라고 큰 화분을 꺼내서 올려놓았다. 잠시 책을 쓸 일이 있어서 집필에 빠져있는 동안 돌아보니 금새 달팽이는 사라졌다. 내가 총총총 이리저리 돌아다녀봐도 보이질 않는다. 흙더미를 찾아도 없다. 혹시나 싶어서 방바닥을 훑었더니 이 녀석은 큰 나무위에서 뚝 떨어져 방바닥에 있었다. 내가 실수로 밟았다면 아주 큰 마음의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밟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결국 나는 작은 달팽이를 양육하는 법에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단순함이다. 작은 화분도 달팽이에게 컸다. 화분속에 들어가서 헤집기를 좋아하는 작은 달팽이에겐 우선은 유리병과 상추잎으로만 며칠동안 키우면서 내 눈앞에서 보이도록 조치를 취했다. 보이질 않으니 걱정되고, 걱정되니 웬지 사라졌다고 착각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제는 클 때까지 커보라고 매일매일 상추잎을 새롭게 갈아주면서 달팽이의 성장을 관찰해볼 참이다. 큰 달팽이는 몸집이 손가락 정도 커서 어디를 가도 금방 내 눈에 들어오고 웅크리면 손톱보다 약간 크고 손가락 마디 정도해서 금새 찾을 수가 있다. 화분위에 올려놓아도 되고, 혹은 나뭇잎 위에 올려놓아도 혼자 알아서 달팽이로서 할 일을 하니 별 걱정이 없다.
인생사, 모든 사건과 사람의 관계가 이 달팽이와 같지 않을까? 잃었다고 한 순간 반갑게 더듬이를 내밀거나, 찾았다고 한 순간 발에 밟히는 어이없는 사건들로 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지고, 인생사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알고보면 사소함으로 이어지고, 단절되고, 다시 연결되면서 그렇게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 같다. 나의 달팽이 두 마리는 이제 잠이 들었고, 나는 그 달팽이가 상추잎의 담요를 덮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제 글쓰는 일에 몰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