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는 ‘뱀의 유혹’이 등장하고, 이후 마태복음 4장처럼 성령에 이끌림으로 살 때, 뱀의 행위가 보여진다. 뱀의 유혹은 생활속에서 수시로 있다. 세균이 보이지 않듯이, 사람은 모를 뿐이다.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가 바로 그것이다.
다윗이 지은 밧세바 불륜 사건과 우리아 간접살인 사건은 ‘다윗의 관점’에서는 죄가 아니다. 다윗은 왕이다. 왕이 왕의 법으로 행했으니, 죄가 아닌 것이다. 밧세바, 우리아, 요압은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우리아를 적진에 보내서 죽게 만든 요압은 오히려 ‘잘했다’는 축복을 받았다.
나발과 아비가일 부부 사건에서는 다윗이 ‘살인의 감정’을 억눌러서 부자 나발의 교만을 칼로 심판하지 않았다. 이후,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남편 나발에게 다윗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나발은 다윗을 몰라본 자신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닫고 공포에 시달리다가 심장병에 걸려서 죽었고, 다윗은 의도하지 않은 나발의 죽음을 보았으며,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았다. 장례식 이후에 결혼식을 올린 것은 나발과 아비가일 부부, 우리아와 밧세바 부부 사건에서 동일하지만, 하나님은 아비가일을 취한 다윗에 대해서는 ‘죄’로 생각하지 않았고, 밧세바를 취한 것에 대해서는 ‘큰 죄’로 여겼다.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이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니” (삼상 25:39)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삼무엘하 11:27)
창세기 1장은 창조, 창세기 2장은 에덴창조, 창세기 3장은 타락, 창세기 4장은 살인이 나온다. 1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문장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이 어떠하냐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관점에서’ 그것을 보면, ‘매우 좋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은가? 사람은 항상 그것을 염두해야한다. ‘선악과 사건’은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정반대였다. 뱀은 ‘선악과’를 사람의 관점에서 보도록 충동질하고, 유혹하는 마약왕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7)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6)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창세기 3:4~5)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것은 “유부녀인 것을 알면서도” 행한 “나쁜 범죄”였다. 우리아는 다윗을 위해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면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다윗은 그 충신의 아내를 몰래 취해서, 임신까지 시키고, 임신사실을 숨기려고 우리아까지 간접살인했으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다윗이 보기에는 ‘전쟁의 공로’요, ‘사랑의 열정’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가인의 아벨 살인으로 이어졌다. 그처럼, 다윗의 불륜사건은 암논의 다말 강간으로 이어지고, 다말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살인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닮은 꼴이다. 모두 알고서 짓는 죄들이 점점점 성장하면서 가족과 국가를 전염시키는 전형적인 모형이다. 훗날, 압살롬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듯’ 다윗의 후궁들을 대낮에 겁탈하고, 왕권은 찬탈하고, 아버지를 죽이려는 배반의 칼을 들었다. 다윗이 ‘다윗이 보기에 좋은 불륜과 살인’을 행하듯, 압살롬도 ‘압살롬이 보기에 좋은 권력의 칼’로 왕권을 차지했던 것이다. 신하들과 백성의 민심은 압살롬에게 모두 돌아섰다. 오직 ‘하나님이 보시기에’만 없었다.
‘사람이 보기에’ 죽는 길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살 길이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道)이다. 도(道)는 길 도(道)이니, 십자가의 길과 방법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하냐이다. 사람이 볼 때 지혜로운 모략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면 ‘죄’다. 다윗이 아비가일을 취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밧세바를 취한 것은 ‘큰 죄’였고, 가족을 파탄시켰고, 말년에 권력누수의 레임덕 현상이 발생했고, 압살롬의 구데타까지 일어났다. ‘하나님이 보기에’ 악한 행위로 말미암은 ‘인과응보’의 결과였다. 죄는 겨자씨같아도, 자라면 ‘칡넝쿨과 가시나무’가 되어서 자신과 가족과 나라를 망친다.
사무엘상 12장에서 사무엘은 ‘사울왕’을 추대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애걸복걸한다.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고 경고한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나무를 놓고 죽음을 경고한 하나님의 말씀과 흡사하다.
이후 첫전투가 발발했다. 사울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서, 전쟁에 나가려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사무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적이 쳐들어오고, 군인의 사기를 떨어지고, 탈영병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사울은 다른 제사장(엘리의 증손 아히야)을 세워서 번제를 드렸다. 번제가 끝나자, 사무엘이 나타났다. 사무엘은 노발대발 분노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사무엘상 13:13)
사울의 행위는 적군이 몰려오고 탈병병이 속출하는 그 상황에 “지혜로운 방법”이었으나, 사무엘과 하나님이 보기에 ‘악한 행위’였던 것이다.
이후, 사울은 “어떤 것도 먹지 말고, 적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창세기 2장 17절 말씀이 문자 그대로 군율이 되어서 선포된 것이다. “음식을 먹는 날에는 죽음이 임한다”고 했다. 명령을 듣지 못한 사울의 장남 요나단이 특공대를 조직해서, 적군 깊숙이 침투했다. 가다보니 로얄제리가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꿀’을 먹었더니, 눈이 밝아지면서 힘이 불끈 솟았다.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삼상 14:27)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육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삼상 14:29~30)
요나단의 꿀 섭취 사건은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사울이 보기에’ 요나단의 행위는 악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하였을까?
사울이 단창을 들어서 ‘악령 퇴치 찬양’을 하는 다윗에게 던졌다. 다윗은 분명히 사울의 영적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 때문에 사울의 단창을 받았다. 다윗은 정반대로 행했다. 원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2번이나 왔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명자’이므로, 죽이지 않았다. 다윗이 보기에는 자신의 원수를 죽이는 것이 합당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위’였으니, 살인죄의 덫을 피한 것이다.
30년이 너무 쉽게 흘렀다. 책 30p 넘기듯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현재의 페이지가 내게 있다. 마음은 늘상 괴롭고, 고단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연 나는 어떠한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의 성경해석은 옳은가? 내 삶의 방법과 태도와 행위는 합당한가? 오늘도 고뇌하면서 아침의 문을 열어본다. 내가 보기에 아름답지 못한 시간이 지나갈지라도, 내가 보기에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고난의 날씨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날’이 오늘도 펼쳐지길 소망하면서……
** 참고 **
선악나무는 ‘선악지식의 나무’이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번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