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보니, ‘성경을 읽지 않은 죄’를 범했음을 시인한다. 30년 동안 ‘자칭 크리스챤’으로 살았다. 기독교인중의 기독교인으로 자부하였던 섭리인으로 자긍심이 대단했던 나는 성경의 핵심을 전혀 몰랐다. 성경 문맹자다. 성경을 모르면서, 안다고 확신한 내 슬픈 과거여!!
엘리야의 사명을 이어받은 엘리사인가? 나는 그 정도로만 인식했다. 엘리야는 엘리야이고, 엘리사는 엘리사다. 예수님이 “오리라한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다”라고 했을 때도, 구약의 엘리야는 엘리야이고, 신약의 세례요한은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은 세례요한의 영혼이 있을 뿐이다. 둘은 완전히 다르다.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이 각각이다.
노무현의 정신을 가진 문재인 대통령이지만, 노무현의 영혼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들어가지 않듯이, 노무현은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나는 나, 그는 그다. 빙의(憑依) 드라마를 보면, 무당의 영과 지옥에서 올라온 황대두가 서로 결합하면서, 선양우 속으로 쑥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영혼이 영혼을 흡수한다는 것인데, 거울을 비쳐보면 각각 영들이 비쳐진다. 공포스러운 영혼의 혼재인데, 모든 존재는 각각 다르다.
엘리사는 사르밧 과부를 전혀 모른다. 수넴 귀부인을 알고, 나아만 장군을 알 뿐이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안다고 해서, 엘리야가 수넴 귀부인을 알 수도 없다. 이처럼 인생은 각각이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다르듯, 엘리야와 세례요한은 다른 인물이다.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엘리야의 영이 세례요한에게 쑥 들어갔다”라고 오해한다. 종교용어로 재림부활이라고 하는데, 거짓이다. 무당처럼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영혼에 사로잡혀 살았다니…. 어불성설이다.
어쨌든, 나는 엘리사가 참 좋다. 물론, 엘리야의 위대한 역사도 탄복하겠지만, 엘리사가 좋다. 엘리야는 3년 가뭄을 선포하고, 요단강에 숨어서 살다가,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만찬을 달라고 요구했다. 먹고 사는 것이 전전긍긍했다. 엘리사는 전혀 다른 목회사역을 펼쳤다. 엘리사는 풍족하게 살았다. 제자중에 빚을 지면서 엘리사의 경제를 책임진 인물이 있었다. 그 제자가 죽자, 과중된 채무에 시달린 제자의 아내가 찾아와서 하소연하자, “기름 그릇의 기적”을 기도해 주었다.
3국 연합군(유대+이스라엘+에돔)이 아람군대와 전쟁을 할 때, 엘리사는 그들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가뭄을 해결해서 비를 내리게 함으로, 흙탕물이 ‘피처럼’ 보이게 함으로 아람군대를 유인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목회철학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수넴 귀부인이 엘리사의 목회사역을 소중히 여기고, 다락방 하숙을 공짜로 제공했다. 엘리사는 귀부인을 위해 ‘생명잉태’를 기도했더니, 정말로 자녀가 생겼다. 그 아이가 두통으로 죽었다. 그때 엘리야는 갈멜산에 있었다. 수넴여인이 간곡히 부탁하자, 엘리사는 지팡이를 게하시에게 주면서 아이에게 놓게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뒤따라간 엘리사는 다락방에서 죽은 아이의 입에 입을 맞추면서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니, 살아났다.
호박죽 사건도 의미심장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제자들이 들에 있는 들호박을 따서 호박죽인지, 호박국인지 끓여서 먹었는데, 엄청나게 쓴 것이다. ‘독이 들었다’고 할 정도다. 엘리사는 “가루”를 뿌려서 호박국의 맛을 완전히 새롭게 했다. 엘리사의 삶은 사람들의 생활권과 직접 연결된다. 조선말 유행했던 실학사상과 흡사하다. 보리떡 12개로 100명의 무리에게 나눠준 사건은 오병이어(五餠二魚)와 직접 연결된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게 해달라고 은20달란트 금6천개 옷10벌의 치료비를 가지고 이스라엘 왕을 찾아가자, 엘리사는 왕의 고충을 대신 해결해주겠다고 하면서, 나아만 문제를 가져왔다. 그리고, “요단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나았다. 치료비는 일체 거절했다. 게하시가 엘리사 몰래 나아만에게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서 착복했다가, 들통나면서 문둥병이 옮았다. 세례요한이 엘리야처럼 금식하면서, 부패한 종교의 심판을 촉구했다면, 예수님은 창녀와 세리를 직접 만나서 전도하면서 그들의 회개운동에 동참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을 치료하면서, 엘리사는 치료비를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신앙’을 알려준 것과 같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인품에 탄복해서 ‘여호와 신앙’이 들어간 인물이다.
길갈에서 요단강으로 이사할 때, 제자들이 나무집을 지으려고 했다. 그때 한 제자가 빌려온 도끼를 호수에 빠뜨렸다. 엘리사를 붙들고서 “빌린 도끼”라고 슬퍼했다. 얼마나 낭패인가? 그때 엘리사는 빠진 위치를 묻고서, 긴 장대를 넣어서 쇠도끼를 꺼냈다. 얼마나 탁월한 생활신앙인가? 빚을 졌으면, 갚아야한다. 도끼가 빠졌으면 나무를 넣고서 꺼내야한다. 아이가 죽었으면 인공호흡을 해서 살려야한다. 밥이 맛없으면, 맛있게 만들어야한다. 전쟁의 승패를 묻는 3국 연합군에게 엘리사는 전쟁의 책략을 직접 줬다. 이기고 지는 것은 책략에 있는 것이다. 엘리사가 보여준 생활속 신앙의 모습이 오늘은 나를 새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