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옳은가? 뱀이 옳은가?
창세기 3장의 물음이다.
힘없는 하나님이 옳은가? 강력한 뱀이 옳은가?
열왕기상 17장 엘리야 시대의 물음이다.
전쟁의 하나님이 옳은가? 평화의 뱀이 옳은가?
출애굽기를 살아가는 이집트 시대의 물음이다.
끌려가는 하나님이 옳은가? 저항하는 뱀이 옳은가?
바벨론 포로시대를 사는 백성들의 물음이다.
짓밟히는 하나님이 옳은가? 지배하는 뱀이 옳은가?
예수님의 십자가 시대를 살아간 성도들의 물음이다.
성경은 A=B의 답이 없다. 누군가 “하만=우상”으로 풀이하면, 그것은 옳다. 그러나, “하만=우상=특정인물”로 풀이하면, 그것은 가설이다. 절대진리가 아니다. “하만=우상=특정인물”로 풀이한 가설을 절대진리로 규정하면, 그것이 곧 ‘우상적 비진리’다. 성경이 그렇다. 창세기 3장을 읽으면서, “나쁜 뱀새끼, 미친 하와, 무식한 아담”라고 욕설이 나올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정경은 구약이며, 창세기는 그들의 헌법전문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당시 종교 엘리트를 향해 “뱀새끼, 독사새끼”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창세기 3장을 읽으며 암송한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뱀의 후예’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뱀은 용이요, 용은 왕이다. 왕은 권력이다. 사두개인은 로마권력에 빌붙은 자들이요, 바리새인은 백성의 민심에 빌붙은 자들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종교 지도자가 드물었다. 이 시대는 어떠한가? 내가 30년 있던 곳은 스스로 지상천국을 노래하지만, 그 위치가 ‘꼬리의 끝’을 알 수 없는 돌무덤이다. 그들에게 “성경을 택할 것인가? 30개론을 택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교주를 택할 것인가?”라고 하면, 그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예수를 택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 그 누구든, 자신이 따르는 스승을 하나님보다 사랑하면, 그는 우상숭배자다. 왕이든, 종교적 왕이든, 따르는 성도에게 섬김을 강요하면, 그는 지배하는 우상권력자다.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우상은 피난처가 없다. 절대충성의 동의어는 맹종(盲從)과 맹신(盲信)이다. 누구든 성도에게 하나님을 가리면, 해가 어두워지는 영적 일식현상이 발생한다. 하나님을 가리면 절대 안된다. 나는 시인한다. 30개론의 감옥에 30년간 갇혀서 성경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무덤을 무덤으로 알지 못했던 내게 예수님이 어느날 성경으로 찾아오셨다. 이제 나는 고뇌의 언어로 말한다.
“우리가 모두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천국인줄 알았으나 그곳에 지옥이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지옥을 지옥으로 알지 못하는 향락의 무감각은 몽유병처럼 우리 영혼을 유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성령이 떠난 곳에서 우리는 아피스와 달춤을 추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없는 행진곡은 하나님께 장송곡이 되었습니다. 망치가 내리쳐도 그 우상은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 고통을 모르는 이 끔찍한 우상의 눈물이여!! 악어의 희락이여!! 이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것들은 뱀의 달콤한 혀에 불과합니다. 생명을 내걸고 옛 뱀과 싸워 이긴 생명의 주가 과연 누구입니까? 예수 외에 누가 예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