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은 “검없는 자는 겉 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말씀했다. 또,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했다. 또한,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했다.
‘칼로 친다’는 표현은 군사혁명이다. 엘리사는 실제로 ‘예후 장군’을 통해서 군사혁명을 일으켰다. 오므리 왕조(아합정권)를 박멸시키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숙청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실제로 백성들이 집결했다. 촛불혁명처럼 상당수의 백성들이 ‘명령’만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 중에는 분명 ‘바라바를 따르는 무장독립 혁명세력’도 많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웬일인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제자들까지 권력암투를 벌였다. 권력이 생기는 상황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가이사처럼’ ‘무장혁명과 평화혁명’에서 운명의 갈림길을 선택한 것이다. 혹자는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라고 하겠으나,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권력에 대항하고, 저항하면서, 권력속에 숨은 마귀와 싸우신 것이다. 종교권력과 싸우는 방법에 있어서, 검을 이용할 것인가, 말씀을 실천할 것인가, 그것을 놓고 씨름하셨으리라. 응답이 없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받아드렸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했다. 하늘군대가 실제로 무장세력으로 움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제자들은 검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검을 쓰지 말고, 그냥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한 것이다.(마태복음 26:56)
싸우지 말고 검을 버리고 백기투항하고, 신앙으로 싸우라고 하시니, 모두 도망친 것이다. 유혈혁명을 그때 일으켰다면, 헤롯정권은 무너졌고, 성전은 예수님이 뺏었고, 빌라도 정권도 물러갔을 것이다. 마치 이슬람의 마호멧 정권처럼 예수님의 군사혁명이 성공했을 것이다. 아!! 그런 유혈혁명이 일어났다면, 예수님의 평화복음이 사라졌을 것이다.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의 가장 아름다운 ‘루비콘 강의 건넘’이다. 갑작스런 체포에 무기력하게 당한 십자가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는 백부장도 있었고, 니고데모도 있었고, 군인들도 상당했는데, 명령만 내리면 움직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군사혁명을 버리고, 십자가혁명을 선택한 것이다.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누구도 함부로 폄하하면 안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버리고, 칼로 쟁취한 권력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면 안된다. 돈으로 쟁취한 성전을 ‘하나님의 뜻’으로 찬양하면 안된다. 오직 십자가다. 유혈혁명(군사혁명)을 버리고, 신앙혁명(종교혁명)을 선택함으로, 피흘리심으로 유혈혁명을 무너뜨린 예수님이다.
십자가 사건은 마태복음 4장이 계시록 20장으로 실현된 것이다. 마태복음 4장은 마귀가 패배하고, 잠시 물러갔다가 다시 예수님을 공격했다. 베드로를 통해, 가룟유다를 통해, 제사장을 통해, 헤롯왕을 통해, 분노한 민중을 통해서 예수님을 공격했다. 그때 예수님은 결박당하심으로 용을 결박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심으로 용을 죽였다. 그것이 계시록 21장이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년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넣어 잠그고 그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요한계시록 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