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누가복음 16:25)
언젠가 교회에서 목사님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건을 본문으로 설교하시면서, “여기서”를 굉장히 강조했다. 아브라함이 “여기서”라고 한 그곳은 “죽음 이후 세계”로서 ‘사후세계’다. 사후세계가 바로 “여기서”이다. 아!! 나의 착각은 현실세계가 ‘여기서’로 여겨지는 것이다. 현실세계도 결국 사후세계에 포함되는 ‘여기서’에 불과하다. 여기는 곧 영원한 시간이다. 죽음을 기억하자. 날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면서, 죽음을 준비하자.
불편한 이야기로 옛날 교회 사건은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하나만 해야겠다. 그곳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 242 황무지가 장미꽃같이에서 후렴구를 ‘거기’를 ‘여기’로, ‘그 길’을 ‘이 길’로 고쳐서 불렀다. 4절과 5절도 “거기 악한 짐승 없으니”를 “여기 악한 짐승 없으니”로,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를 “여기 죄인 전혀 없으니”로 고쳐 불렀다. 그때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정말로 은혜로웠다. 주예수는 ‘주님’으로 고쳤다. ‘거기’를 ‘여기’로 고친 그 작은 고침이 뱀의 유혹이라면,,,,,,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은 하나님이 보시는 ‘영원한 여기’에 속한 부분임을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지금 살고있는 현재만 쳐다보다가, 영원한 여기를 망각하면 낭패를 당한다. 지금 잘된다고, 지금 부유하다고, 그것이 죽음 이후의 축복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한다. 사람은 100년 안팎으로 살아간다. 광화문에 가면 나는 항상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쳐다본다. 그들은 이미 죽었고, 동상으로 존재한다. 그 영혼은 어디선가 살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기억해야한다. 지구는 30C에도 태양을 돌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후세계의 여기서’ 살아갈 것이다. 지금 여기서, 영원한 그때를 준비하는 것이다.
주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날이다. 하와는 안식일에 산행을 했거나, 골프를 치러 갔거나, 보험 영업하러 갔거나… 그러다가 뱀을 만나서 유혹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다. 그리고 뱀의 말을 복음 전하듯 남편에게 말했다. 마치, 앗수르 대왕 산헤립의 말을 “말씀으로” 대변한 변절자 랍사게처럼!!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을 지켜야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가치가 다시 새겨진다. 날마다 성경을 읽어도, 주일날 단상에서 선포되는 능력의 말씀을 들어야 무감해진 마음이 꿈틀거린다. 자신의 무감각이 깨지지 못하면, 불행한 부자가 될 수 있다.
[설교말씀 요약노트] “선행을 베풀 기회가 문앞에 있었는데, 부자는 잔치한다고, 높은 사람들 만난다고, 사업한다고 소외된 약자를 돕지 못했다…..부자는 자신의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데로 썼는데, 지옥에 갔다. 부자가 거지를 외면하고 담을 쌓고, 단절의 금을 긋고 만리장성을 쌓았더니, 죽어보니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건너갈 수가 없었다. 부자가 거지를 도울 선행을 외면하고, 높게 쌓은 단절의 벽에 자신이 갇혔다. 부자처럼 소외와 배제가 교회에 있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