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찍 잠에서 깼다. 형광등을 켜니, 온통 집은 대낮이다. 불을 끄고 작은 조명등을 켰다. 노트북과 성경책만 빛이 비추고, 방은 어둠이다. 눈은 보는 곳만 보듯, 빛은 비추는 곳만 빛난다. 침묵이 공허한 방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오늘은 3월 25일, 마가복음 1장을 읽었다. ▲이사야 예언 ▲세례요한 출현 ▲엘리야 모습 ▲요한의 요단강 세례 ▲광야 시험 ▲복음 전파(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귀신박멸 ▲베드로 장모 열병 치료 ▲새벽기도 ▲나병치료 등등 엄청난 사건이 1장에 모두 담겼다. 마태복음 1~8장이 압축됐다.
마가복음 1장 35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적혀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에 내 마음이 멈췄다. 내 인생의 중년이 한적해졌다. 너무 갑작스런 종교적 결별을 경험한 후, 이집트를 나오는 듯, 바벨론으로 옮기는 듯, 원점으로 돌아온 듯, 에덴동산을 떠나는 듯, 새로운 광풍이 부는 듯, 성령의 바람이 부는 듯, 내 인생은 광야길이다. 그래서 한적해졌다.
야곱의 들판이요, 롯이 떠나고 남겨진 아브라함의 쓸쓸함이요, 술관원장이 복직하고 함흥차사 소식이 없는 요셉의 감옥생활이다. 고요한 시간의 들판에서 나는 알퐁스도데의 별처럼 성경을 읽는다. 읽고, 읽고, 읽는다. 불현 듯, 30년이 30초로 지나가고, 나는 1989년 3월 25일 고등학교 2학년 자취방에 있다. 그때 내가 기도했던 그 예수님을 부른다.
“그렇구나, 주님은 항상 나를 따라 다니셨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짝을 지날지라도 주님은 나를 보호하셨구나.”
예수님은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
1. 일어나셨다.
2. 나가셨다.
3.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4. 거기서 기도했다.
기도는 ‘여기서’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하는 것이다. ‘거기’는 ‘여기’를 떠나서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 곳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홀로 남겨진 쓸쓸한 들판이 기도할 ‘거기’다. 기도의 장소는 항상 ‘홀로 남겨진 버려진 땅’이다. 공간적으로, 심령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렇다.
마가복음 1장 36절에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났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 인생은 사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저기로 주님은 이동하신다. ‘가까운 마을들’로 옮기셨다. 아주 멀리 옮기지 않고, ‘가까운 마을’로 옮기신다. 날마다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시면서 전도의 반경을 넓히셨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전도와 기도 2가지를 하셨다. 전도(傳道)는 길 도(道) 전할 전(傳)이다. 길 도(道)는 머리 수(首) 갈 착(辶)이다. 머리가 갈 길을 알려주는 것이 전도다. 말씀이 곧 전도다. 주님은 말씀과 기도 2가지를 행하시며 인생을 사셨다.
말씀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기도는 사람과 떨어져서 하나님과 만나면서 그렇게 사셨다. 하루를 살면서 ‘한적한 장소에서 한적한 시간을’ 하나님과 보내는 기도의 시간을 마련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기도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주님을 따른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 따랐다. 그물은 생업이요, 직업이요, 딸린 식구들의 밥줄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아버지를 버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불효자로 사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쉬운 선택이 결코 아니다. 하루를 살면서, 시간을 결단하고, 하나님의 시간을 정해서 구분해야, 기도할 시간도 마련할 수 있다.
새벽에, 아무도 없는 나의 방에서, 조명등만 밝히고, 주님을 부른다. 침묵은 그 울림이 웅장하다. 이 새벽, 나의 교회를 위해서, 나의 사람들을 위해서, 나의 사연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구체적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의 복을 구하였다. 한적한 중년으로 내몰린 축복을 주셔서, 그 또한 깊은 감사를 드렸다.
누가복음 16장에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앞에 버려졌다. 피부병에 걸렸으나 치료비가 없어서 개들이 핥는 자연치료법에 메달렸다. 버려진 곳에서 거지 나사로는 기도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고, 부자를 위해서도 분명 기도했을 것이다. 경제적 빈곤에 처해서 개들이 핥듯 연명하는 자들도 있고, 명예적 빈곤에 처해서 개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사는 자들도 있고, 정치적 빈곤에 처해서 감옥에서 상실감을 견디는 자들도 있다. 그 쓸쓸함을 축복으로 견디면서 인생은 사는 날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산헤립의 20만 대군의 침공앞에 기도한 ‘이사야 선지자와 히스기야 왕’도 거지 나사로의 신세였다. 그들이 기도함으로 산헤립이 결국 암살당했고,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서 살아나 15년이나 더 살았다. 특히,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에게 이사야는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예언하자,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다. 기도는 버려짐의 암담한 현실에서, 구원의 손길이 모두 차단된 차가운 벽을 향해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