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족한 장애(障碍)의 방향
오늘은 4월 9일 마가복음 9장을 읽었다. 8장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십자가를 반대했다.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에 선전포고를 한다. ‘십자자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가복음 9장에서 ▲변화산상 ▲간질병 치료 ▲십자가 교육 ▲권력암투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 빌립보에서 가버나움으로 이동하면서 진행된 사건들은 하나로 귀결된다.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서열을 놓고 다퉜다면, 공동체가 훗날 커졌을 때, 분열은 불보듯 뻔하다. 베드로 공동체와 요한 공동체가 싸울 것이다. 예수님은 먼 미래를 미리 내다보신 것이다. 마가복음 9장은 제자 공동체에 대한 심각한 교육이다.
가버나움에서 제자들끼리 권력암투가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품고,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물 한그릇이라도 주면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작은 자들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했다.
1번과 3번은 제자 공동체 안에서 화목과 다툼을 말한다. 2번은 공동체와 세상의 관계를 말한다.
마가복음 9장 42절~50절까지 정말로 섬뜩한 비유가 나온다. 비유라기 보다는 실제 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1) 손을 찍어 버려라, 2) 발을 찍어 버려라, 3) 눈을 빼버리라고 했다. 이 비유는 잠언6:16과 연결되는 것 같다.
[잠언 6장]
16.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17.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손은 행하고, 발은 걷고, 눈은 관점이다. 많이 행하고, 많이 걷고, 많이 보는 것이 좋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하면, 나쁜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들이 형제들끼리 약탈하고, 세상을 발로 차고, 세상적인 것을 바라본다면, 권력의 노예로 사는 것에 불과하다. 손은 품고 나눠주라고 만들었는데, 남의 것을 뺏는데 사용된다면, 차라리 손이 하나 없는 것이 낫다. 공동체가 가난함으로 서로 품는 것이 낫다. 제자 공동체는 갑자기 밀려오는 백성들의 환대속에 ‘권력의 맛’을 보았다.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셨다. 손과 발과 눈을 뺀 장애인으로 천국에 가자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돈에 대해, 명예에 대해, 교회와 신앙인은 장애를 가져야한다. 장애(障碍)는 가로막혀 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을 쟁취하면, 돈을 소유하면, 명예롭게 살면, 그것이 천국같아도 지옥일 수 있다. 남의 것을 뺏고 깊은 탐욕의 손을 제거하는 것, 사업을 줄이는 것, 시간을 자르는 것, 그것이 더 낫다. 소득을 줄이는 것으로 점점점 소돔땅을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 있다. 드라마를 보면 한결같이 ‘풍년속 전쟁’이다. 창세기 41장 바로의 꿈처럼, 풍년속 흉년이다. 풍요로울 때 저축하고(겸손), 빈곤할 때 나눠주는 것(나눔)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흉측한 소가 살진 소를 잡아먹는 것은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마가복음 9장에 따르면, ‘세상적 장애의 방향’에 천국이 있다. ‘세상적 풍요의 방향’에 지옥이 있다. 나는 장애를 가지는 방향을 택해야겠다. 세상 모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없다면 그곳이 지옥이다. 남들이 보기에 비정상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이 계시면 그곳이 천국이다. 결국,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가룟유다가 죽었고, 유대교와 단절하면서 ‘세상속 소금 공동체’로 새롭게 방향을 설정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소금 정신, 십자가 정신이다. 탐욕의 소돔이 되지말고, 희생의 소금이 되야한다. 결핍의 장애가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옛날 교회에서 그 목사님도 출옥후 가지치기를 많이 하셨는데, 소나무를 자신으로 보고, 전지작업을 하셨으면 더 좋았으리라. 나무는 가지치기 하시면서, 정작 공동체는 가지치기 하지 못하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출발점은 ‘나로부터’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마가 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