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이 있어서 쉼을 얻는다. 심령의 안식이다. 사람들은 휴일에 등산을 가거나, 토요일의 향락이 가져온 피곤을 풀려고 각자의 안식을 취하는데, 믿는 성도는 주일이 심령의 안식처이다. 오늘은 ‘멍에’의 개념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다.
마태복음 11:30에 ‘멍에’가 나온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다”라고 말씀했다. 멍에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는 멍에는 무엇일까? 그 멍에를 메면, 쉽고, 가볍다.
마태복음 10장과 연결해서, 11장을 파악하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의 방법을 뜻한다. 종교정책이 많이 달라졌다. 율법은 동일한데, 율법의 해석을 놓고, 기존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이 의견대립의 갈등을 이룬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전면전을 펼쳤다.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고,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해주면서, 이스라엘에 복음의 새로운 바람이 불게 했다.
그 당시, 죄사함을 받으려면 소와 돼지를 잡아야하는데, 그것 없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 얼마나 축복된 말씀인가!! 경제적 고단함을 가진 자들에게 죄사함의 방법은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 당시 종교귀족들에겐 밥그릇이 날라가는 혁명적 말씀이다. 어쩌랴!!
예수님은 분명하게 ‘나의 멍에’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복음’과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가 곧 멍에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게 되면, 그 말씀이 믿는 성도에게 임한다. 그 순간, 빛이 임하고, 주변은 어둠이 된다. 주변의 어둠이 멍에가 된다. 말씀을 진실로 믿지 않으면, 빛이 없으니 어둠속에 안락하게 살 수도 있다. 그 평화는 어둠의 질서다. 말씀을 진실로 믿으면 빛이 비추므로, 주변은 어둠으로 갈라놓는다.
마태복음 11장과 연결된 12장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걸어갔다. 배고픔의 멍에를 그대로 짊어지면서 갔다. 몇몇 제자가 밀밭 이삭을 몰래 훔쳐 먹었다. 그때 염탐하던 바리새인들이 절도죄로 고소한 것이 아니고, 안식일을 범한 죄로 고소한다. 안식일을 범한 죄는 곧 기존 종교에서 정한 ‘범죄사실’이다.
예수님은 그 사건을 ‘다윗의 진설병 사건’으로 비유하면서, 무죄를 선고한다. 기존 종교 지도자들이 ‘죄’로 보는 것도 예수님께 나오면 ‘무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중풍병자는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도록 허락을 받았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는 사형의 극형에 해당하는데, 예수님은 형사사건의 기각판결로 ‘무죄’를 선언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는 어떤 과부의 두 렙돈이 가장 많은 헌금이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제물을 살 수도 없는 두 렙돈인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가장 많은 헌금액수에 해당된다. 예수님의 계산법은 뭔가 달랐다.
믿는 성도는 설교에서 은혜를 못 받을 수도 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는 설교에 크게 은혜를 못 받은 듯 하다. 전날 밤새 고기잡이를 했는데, 소득이 없었다. 빈 그물로 아침을 맞았는데, 예수님이 배를 빌려달라고 했다. 장모의 열병을 고쳐준 사건을 기억해서, 배를 빌려주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집에 가야하는데, 배를 빌려줘서 가지도 못하고, 발이 묶였다. 설교가 끝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와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
예수님은 고단한 성도의 직장까지, 생활고까지 찾아와서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그래서, 그의 멍에를 메는 것이 쉽고, 쉼을 얻는다. 설교에서 은혜를 못 받은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해서 행함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사건을 체험하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깊은 곳까지 오셔서, 삶의 한복판에서 말씀의 그물을 오늘도 내리신다. 내 심령속에서 나를 붙잡길 바라신다.
PS. 말씀에 의지해서,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했다. 기대하지 않지만, 말씀을 실천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전도(傳道)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에 데려오는 것을 전도(傳道)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전도(傳道)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