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스스로 편집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
– 장창훈 작가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을 뜻한다. 직경이 100m 정도 되는 직사각형 큰 연못이다. 모서리 4곳과 중앙에 행각이 설치되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면 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과학적으로 간헐천이 솟는 온천지역이다. 마그마 현상에 의한 그 간헐천이 솟을 때 먼저 도착해서 몸을 씻은 병자는 뜨거운 열기로 병이 나았다. 요한복음 5장 본문에 나오는 환자는 38세였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38년동안 헤맸던 신광야를 영적으로 상징하고, 그 시대 평균수명이 40세였으니, 또한 죽을 때가 거의 된 환자였다. 주님은 그가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것을 이미 아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6)
낫기 위해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그 환자에게 왜 주님은 질문을 던졌을까? 주님은 소경에게도 “네가 보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소경이면, 눈 뜨기를 원할 것인데, 왜 주님은 물어본 것일까? 누워있는 환자에게 왜 주님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을까? 소경일 경우, 그것이 직업이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면 장애인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환자의 의지를 물어본 것이다. 낫겠다는 그 의지가 믿음이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에 몰려있는 모든 환자들을 향해 “일어나 걸어가라”고 선포하지 않았다. 각 사람을 방문해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다시 확인하고, 그때 병을 고쳐주셨다. 그 이유는 병을 치유하고, 후유증이 있기 때문이다. 후유증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범할 것인가? 병을 치료할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님은 정확히 물었다. 그리고, 병자가 행위로서 그것을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안식일법을 범한 것이다. 유대전통으로 안식일법은 의료법처럼 엄격했다. 의료법은 사람이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다. 의료인만 치료할 수 있다. 카이로프래틱이나 각종 대체의학 전문가들이 환자를 치료하면, 그것이 불법이다. 레이저를 활용해서 환자를 함부로 치료하면 안된다. 마사지도 의료법 위반이다. 병자가 만약 고쳐졌다면, 그것이 불법이다. 안식일법이 그러했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었고, 그 병자는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가 없었다. 주님은 공개적으로 병자를 치료했고, 그 병자도 공개적으로 자리를 들고 걸어감으로 안식일법을 범했다. 안식일법을 어기는 것이 곧 치료의 방법이다. 전통을 벗어나라!!
성령은 전통의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방법으로 살아야한다. 우향우!! 성령은 우향우를 말씀한다. 그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것은 “우향우”를 말씀한 것과 같다. 나머지는 계속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전통의 전설에 따라 살 것이고, 오직 38년된 병자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곳을 떠나는 ‘새로운 아브라함’이 된다. 그는 베데스다를 출발한 그 시대 아브라함이었다.
나는 조직과 협회를 사랑한다. 왜냐면, 그곳에는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고, 각종 정보가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의 톱니바퀴를 증오하고, 협회의 굴종을 거부한다. 사람이 협회를 만들고, 그 협회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협회는 감옥이 된다. 사람과 협회의 관계는 상호 유기적인 협력관계여야한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도 그렇다.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고, 국가의 정권을 잡은 정당의 이념과 이익을 위해서 행정력이 발휘된다면, 그 국가는 기능이 상실된 것과 같다. 선거를 통해서 정부는 교체된다.
교회에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 루터의 개혁정신은 무엇인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를 통해 예언된 새로운 제사장 직분이며,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를 ‘제사장 직분’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기존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과 대립관계를 이룬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존 율법의 정신은 계승하고, 율법에서 정한 제사장 직분의 상속권에 반대한 것이다. 이것이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른 대제사장 직분이다. 전통을 벗어나지 않으면, 예수님의 위대한 십자가 정신을 따를 수 없다.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해야한다. 누구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된다.
이단교회는 장점이 있으나, 단점이 더 많다. 첫째, 단점이 단점인 것을 모르는 단점이다. 자신들이 따르는 그 지도자가 100% 옳다고 믿는 그것이 맹점이다. 고정된 모든 것은 우상이다. 태양이 움직이는데,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절대자라고 믿는 그것이 우상숭배다. 옛날 미신종교는 태양을 그렇게 숭배했다. 피조물에 불과한 태양을 섬기는 것이나,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실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각각 관계하면서, 예수님을 통해서 1:1로 말씀하신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사랑한다. 중매장이가 그 사이에 들어올 수 없다. 이것이 개인의 주체적 자유다. 주님은 양떼속에서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셨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이나 누워있던 그 병자를 직접 불러서, “안식일법을 범하는 행위로서 고침을 받으라”고 권면했더니, 그는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고, 후폭풍이 몰려왔다. 곧 ‘죄인’이다. 병자로 살 것인가? 죄인으로 살 것인가? 율법을 범하는 죄인이 됨으로, 그는 고침을 받았다. 이것이 개인의 자유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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