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스스로 편집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
– 장창훈 작가
[2편] 땅의 자유는 본래 없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렇고, 18C까지 땅의 소유권은 일반 백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물질에 대한 소유권이 허락된 것은 시민혁명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왕이 모든 땅을 소유했고, 제후들이 그것을 왕의 대신으로 다스렸다. 그래서 백성은 종이며, 노예다. 땅에 심겨진 나무같은 존재였다. 소작농이 되어야만 살 수가 있었으니….. 그런데, 지금 시대는 왕을 바꾸는 권한이 백성에게 있고, 왕을 바꾸는 권한인 법을 바꾸는 권한도 백성에게 있다. 놀라운 자유민주주의다. 우리는 독재를 거부하지만, 독재정권에 있는 백성들에게 “독재”를 거부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적이다. 역적이 되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의 역적이 되어서,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 길이 자유의 좁은문이다. 율법을 순종하는 자마다 그곳에 갇히고, 율법을 거부하는 저주의 십자가에 메달린 자마다 참 자유를 얻는다. 율법이 볼 때는 저주요,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자유다.
사람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사회의 부속품은 아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독립된 인격체이며, 창조주의 본성이 들어있다. 그것이 영혼이며, 양심이다. 영혼이 곧 양심이다. 신학자들이 양심과 영혼을 구분해서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그들도 모른다. 단지 이론으로 설명할 뿐이다. 창조주의 속성이 사람에게 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그 자유는 창조주의 본성으로 창조능력을 갖는다. 그것이 자유의지다. 하나님을 믿을 권리가 사람에게 있어서,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자유선택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추운 겨울을 보내라고 발열 양털 매트리스를 보냈다고 하자. 그런데, 선물받는 분이 따뜻한 담요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자유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정중하게 새로운 선물이 필요하시냐고 물어봐야한다. 상대가 원할 것으로 예측하고 선물을 보냈으나, 상대의 의중을 잘못 파악했으니, 다시 물어서 선물을 보내면 된다. 선물은 그 물건이 아니고, 마음이다. 또한 상대가 그 선물이 좋다면, 그 또한 자유의사다. 선물은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자유의사가 있다.
그런데, 왜 학교는 여전히 지식의 선물을 학생에게 강요하는가? 최근 인헌고 사태를 보면서, 교실의 교육 프로그램은 ‘토론식 교실’로 변경되었는데, 그것을 담당하고 책임지는 교사는 조선시대 서당과 비슷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물론 몇몇의 미꾸라지 교사 때문에 전교조 전체가 욕을 얻어먹는 것이다. 전교조가 사회악일 수는 없다. 전교조가 교육정책에 기여한 공로는 분명히 있다. 일방적으로 특정단체를 매도하는 것은 편협한 집단주의 획일사상이다. 위험하다. 전교조에 속한 교사들이 학생들을 교육할 때 이념에 의해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취재를 통해 자주 들었다. 그래서 “전교조”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있다. 그들이 전교조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조만한 학부노는 보수적 교육감을 선택할 것이고, 특히 정직한 보수 교육감을 선택할 것이다. 그때 학교는 새로운 혁명을 맞이하리라!!
학생은 교사월급을 주기 위한 부속품이 아니다. 오히려 교사는 학생들을 섬겨야한다. 학생이 있어서 교사가 있는 것이지, 교사가 있어서 학생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설립을 하려면 학생수가 충원되어야한다. 학생이 없는 학교는 국민이 없는 국가와 똑같다. 국민의 요구, 학생의 인권, 백성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지도자는 무능하다. 옛날 교회에서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시간이 있어서, 내가 그동안 봤던 내용들을 솔직하게 말했더니, 웬걸 열린 대화가 보복이 되어서 돌아왔다. 아!! 그렇구나!! 보복의 부메랑이여!! 인헌고 사태가 그러하다. 교사들이여!! 그러지 말라!! 학생은 어린양과 같으니, 그들이 교사를 가르친다. 예수님도 어린양과 같은 아이를 세워놓고, 제자들을 훈육했다. 교사들이 침묵하니, 학생이 교사가 되어서 교사들을 가르친다. 집단주의에 매몰된 기계부품처럼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인헌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과연 전교조는 획일적으로 반응했는가? 다양하게 반응했는가? 사람이라면, 결단코 의견일치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창조적 상상력이다. 그런데, 획일적 문장으로 똑같은 문장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사람의 탈을 쓴 마네킹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우상일 뿐이다. 망치로 깨뜨려라!!
자녀의 신앙은 강압적으로 안된다. 강압적으로 신앙을 주입할 경우, 20세가 넘을 경우 대부분 신앙을 외면한다. 신앙은 자발성의 자유의지에서 출발해야한다. 언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멱살을 잡고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는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도 자발성에 근거해서 3일동안 함께 여행을 하고, 모리아 산에 오를 때는 스스로 깨닫도록 나무번제를 지도록 했다. 아브라함은 칼과 불을 들고, 이삭은 나무번제를 짊어졌으니,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과연 이삭이 몰랐을까? 그 정도면, 이삭도 눈치를 채고서,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서 올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이삭은 아버지보다 하나님을 믿었다. 이삭이 하나님을 믿었으니 아버지를 따라 모리아 산에 오른 것이다. 그래서 번제사건 이후에 둘은 각각 다른 길로 내려왔다. 이것이 신앙의 자유다.
천주교와 개혁기독교는 각각 다른 길로 십자가의 길을 내려온다. 길이 전혀 다르다. 자녀의 신앙이 신앙나무로 성장하도록 하려면, 스스로 하게 해야한다. 어려서 신앙의 겨자씨가 심어지도록 양육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으며, 자유의지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는 습관을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을 사귀면서 살아가면, 성령께서 중력처럼 그 인생을 붙들 것이다. 성령은 중력과 같아서 인생이 하나님께 붙도록 한다. 성령은 자유의지의 생기를 사람에게 불어넣는다. 부모는 가족교실에서 자녀에게 교사와 같다. 교사는 교육하는 사람으로, 부모가 첫째 교사이며, 학교 교사는 지식의 교사이다. 부모의 책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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