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스스로 편집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
– 장창훈 작가
[7편] 베드로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냈다. 사도 바울이 공개적으로 갈라디아서 편지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다. 율법주의자로서 이방인 성도들을 외면했던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이 갈라디아서에 나온다. 베드로는 사도 바울처럼 전통적 유대인이며, 예수님을 최측근에서 따랐고, 최측근에서 부인했던 존재다. 그런데, 성경은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노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를 참회하고, 과거를 침묵하지 않고 간증하고, 과거를 토대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공관복음에는 모두 베드로의 “추락”을 공개적으로 증거한다. 베드로의 부활된 신앙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전승에 따라 흘러온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죽었다. 그것은 참회의 고백이었다.
마지막 모습을 통해서도 그의 평생 삶이 복음서의 기록처럼, 참회하고 공개적으로 간증하면서 그렇게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열린 사고를 가졌다. 고넬료를 전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3번의 환상을 통해 성령의 지시를 정확히 깨닫고, 고넬료의 가족에 성령역사를 일으켰다. 베드로가 성령을 소유하지 못하고, 성령이 베드로를 소유하고, 움직이고, 성령은 성령의 뜻대로 행함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성령의 뜻에 순복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하다. 그가 본래 믿었던 것은 전통 율법주의였다. 그런데, 성령의 뜻이 반대편에 있음을 알고, 노선을 바꿨다. 그곳이 예수님의 복음주의다. 열린사고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틀렸음을 양심으로 알면서도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고백할 때까지 ‘감옥’에 갇힌다. 사도 바울은 알았을 때, 그 때 자신의 무지를 벗어났고, 또한 3년 동안 깊은 영성 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이것이 진리에 의한 자유다. 모르면, 그것을 인정해야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명을 제자 공동체를 대표해서 깨닫고 증거한 인물인데, 보기좋게 3번이나 부인했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경험한 인물이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한다. 인헌고 사태를 보면, 왜 교사는 학생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낮아지지 않고서 높아지려는 자는 ‘지하’로 추락할 수도 있다. 낮아져야한다. 교사도 모르는 것은 학생에게 배워야한다. 인헌고에서 누가 교사이고, 누가 학생인가? 학생이 교사를 가르치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인가? 배움은 모든 모양에서 아름답다. 유교에서도 “어린아이에게도 배운다”고 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고, 배웠다. 12세 소년 시절에는 랍비들과 대화를 통해서 배우고 가르쳤다. 베드로도 주님을 따르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면서 진리를 가르쳤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상호 배움의 관계이지, 수직적 지식소통은 없다. 수직적 지식소통은 주입식 교육이며, 전교조 출신중에 이념의 덫에 빠진 자들이 학생의 미래를 망칠 뿐이다. 진정한 교육은 답안지를 주는 것이 아니고, 학생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창조적 상상력을 생기로 불어넣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교사도 학생에게 배우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열린 세계다.
고린도교회는 당파싸움이 있었다. 이러한 자를 일컬어 “육신에 속한자”라고 한다. 보이는 지도자에게 속하는 사람들이다. 지도자는 주님이 쓰는 사역자이다. 포장지다. 주님은 지도자를 쓰기도 하고, 성도를 쓰기도 하고, 세상 사람을 쓰기도 하고, 이단 교주를 쓰기도 하고,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쓰기도 하고, 세상뉴스를 비유로 계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의 심령을 직접 들어와서 자신을 쓰기도 한다. 주님은 공간과 사람을 초월해서 활동하신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부활소식”을 전달했다. 주님은 자신이 보기에 불편한 존재를 통해서 진리를 외치게 할 수도 있다. 주님은 다양한 모습과 사건으로 나타나 활동하신다. 그런데, 1명의 지도자만 중심하면, 주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다.
주님은 지도자만을 중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천동설적 사고관이다. 주님은 주님을 중심한다. 이단교회의 맹정이 여기에 있다. 지도자가 틀릴 수 있음을 이단교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날마다 하나님께, 사람에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열린 사고를 가진 신앙인이다. 그러한 인물은 신령한 자다. 신령한 자는 신령한 성령에게 속해서, 지도자를 초월한다. 이러한 사람은 누구의 단점이 보이면, 그 단점을 놓고 눈물로 기도한다. 지도자는 성도의 장점과 단점이 보일 수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성도의 단점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하고, 성도도 동일하다.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주님께서 진리와 사랑으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신다. 믿음으로 간구하면, 사람은 겨자씨처럼 서서히 변화한다. 그래서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을 위해서도, 세상의 지도자를 위해서도 그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도록 기도해야한다. 진리는 무엇인가? 내가 지금 옳다고 믿은 것이 언젠가 틀린 것을 명확히 알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열린 사고다. 열린 사고를 갖지 않으면, 진리가 진리로 여겨지지 않으므로, 닫힌 사고를 가진 자들은 영원히 진리를 진리로 알지 못한다. 진리는 열린 사고를 가진 자들에게 나타난다. 율법은 닫힌 사고를 가진 틀이며, 주님은 그러한 틀을 벗어나서, 38년 된 병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줬다. 율법이 100% 옳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게 한 것이다. 주님은 불완전한 율법을 십자가를 통해 완전케 하셨다.
우리 인생은 어떠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주님께서 바라는 그 일인가? 주님께서 원하는 일인지 생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베뢰아 교회 성도처럼 ‘너그럽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가? 갈라디아서를 통해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은 베드로는 훗날 바울과 더 깊은 동역자가 되었다. 베드로는 송년회에서 바울의 비판을 받았고, 그 사건이 갈라디아서 편지에 기록되었는데, 놀랍게도 사도회의에서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증거해준다. 그는 열린 사고를 갖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배움의 사나이였다. 진리의 속성은 ‘배움’이다. 배움의 자세 즉,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를 잃어버린 자는 진리에 대해 소경이다. 배움은 진리의 눈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