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2장에 보면, 유다 백성들의 병폐가 나온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국제화 시대에 맞게 외국여자와 결혼한 유다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다. 바벨론 포로시대를 경험한 유다 백성들은 ‘세계화 물결’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방여인을 취함으로 세계화의 표본을 가정에서 이루려고 했다. 하나님의 뜻이 마치 이뤄졌다는 식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건에 분노했다. 왜냐면, 이혼당한 조강지처가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하나님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한쪽에서는 울고, 한쪽에서는 웃고, 어찌 그런 비극이 있을까? 남편을 뺏긴 조강지처는 이혼녀가 되어서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하고, 남편을 새롭게 얻은 이방여인은 하나님께 “축복”을 강구하니, 그 비극의 원인은 남편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각각 만들었고, 짝을 만들 때는 유일한 한 사람을 만들었다. 말라기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조강지처는 하나님께서 맺은 유일한 ‘언약의 배우자’이다. 사랑의 자유가 있으나, 그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묶인다. 그것이 사랑의 자유다. 기차가 선로를 벗어나면 탈선하듯, 사랑도 진리를 벗어나면 탈선한다. 그 진리가 언약이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맺은 조강지처를 버렸다. 버렸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비웃는다. 그와같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폐하시겠는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조강지처를 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맺어진 ‘조강지처’를 버리시겠는가? 왜 이스라엘 민족이 1948년에 독립했겠는가? 독립하지 않더라도 그 민족은 이미 지구촌 전체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아가는 민족이다. 그 민족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다. 왜 그러하겠는가?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았다. 그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류를 향한 영원한 사랑의 증표로 삼았다. 언약을 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말 2:14)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하나님이 증인이 되신다. 어린양은 인류의 신랑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짝이 되어, 구원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인격적 얼굴’로 이 땅에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 어려서 맞이한 아내를 버리면 안된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어린양 예수님을 버리시겠는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구원주’로 인정받은 예수님이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우주적 그리스도로 이 땅을 성령의 행정으로 통치하신다. 결혼이 자유하고, 종교도 자유롭지만, 십자가를 폐하는 종교는 생명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왜 십자가를 폐하는 종교마다 예수님을 부인하겠는가? 그것은 예수님과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속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