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은 해석적 관점에서 정반대 결과를 낳는다. 보여지는 현상은 동일한데, ‘해석’이 다르다. 해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본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논란이 많다. 핵심은 ‘해석의 관점’이 곧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바울신학은 ‘하나님의 기준점 찾기’다.
9장 서두에 바울은 민족의 이스라엘을 높인다. 이것은 의도적이며, 경륜에 따른 신앙고백일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주님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런 심경으로 바울은 민족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는데……
그 이스라엘이 누구냐고 바울은 묻는다. 아브라함의 씨중에 누가 유업을 이을 자인가? 이삭이다. 하나님께서 결정한다. 야곱과 에서중에 누가 유업을 이을 자인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결정한다. 하나님께서 선택했으니, 야곱이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관점이다.
바울은 “모세와 바로”를 내세운다. 두 인물은 극명하게 대립을 이룬다. 바로는 완악함, 모세는 순종이다. 바로가 완악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모세를 따라 갔던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았고, 모세를 거역하고 반대했던 바로의 군대는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끝부분에 정반대 해석이 나온다. 모세와 바로가 뒤집힌다. 역사적 사건에서 모세는 의인이요, 바로는 악인이겠지만, 모세의 후예와 바로의 후예는 다를 수 있다.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고, 의의 법(율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토기장이 비유도 유심히 살펴야한다. 하나님께서 2개의 그릇을 만들었는데, 바울은 “이 그릇은 우리다”라고 선언했다. 그릇 하나는 진노를 보이시려고, 다른 하나는 영광을 보이시려고 만들었다. 그런데, 완성된 그릇은 ‘진노를 위해 만든 천한 그릇’이고, 버려진 그릇은 ‘영광을 위해 만든 귀한 그릇’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도 토기장이요, 하나님이다.
귀히 쓸 그릇은 모세요, 유대인이다. 천히 쓸 그릇은 바로요, 이방인이다. 그런데, 천히 쓸 그릇인 이방인이 오히려 ‘의’를 받았으니,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 만들어진 그릇위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니느웨에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된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유대교에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된 것과 같다.
인생은 내면의 갈등이다. 두 개의 법, 두 사람이 존재한다. 하나는 모세, 다른 하나는 바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선과 악’이 내면에 공존한다. 선(善)은 영이요, 악(惡)은 육이다. 육은 곧 본성을 뜻한다. 성령을 받은 자는 영이 강한 힘을 받아서, 육신의 본성을 다스릴 수 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영은 육에게 끌려다닌다.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모세는 바로왕을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도망갔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생활을 하다가, 40년 끝자락에 하나님을 만났다. 성령이 모세의 심령에 임하니,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이집트로 돌아갔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모세는 바로왕을 이긴다. 이와 같이, 성령이 임한 영은 육신의 본성을 다스린다. ‘본성’을 상징하는 바로는 그대로 존재한다. 그 성질이 더욱 완악해진다. 완악해질수록 ‘돕는 성령’의 힘도 강해지면서 다스린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육신의 생각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세가 바로왕과 싸우듯이,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마음속 정욕과 탐심과 불의와 미움과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 싸워야한다. 영적전쟁은 심리전(心理戰)이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어둠과 싸우는 것이 곧 신앙이다.
“모세와 바로”에 대한 바울의 선언은 혁명적이다.
“모세는 선하고, 바로는 악하다”는 이분법을 완전히 깨뜨린다. 모세와 바로는 모두 하나님께서 세운 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에 보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에 대해서도 “내가 너를 세웠다”라고 말씀한다. 그 말씀을 믿은 자는 모세이고, 믿지 않은 자는 바로일 뿐이다. 결국 ‘믿음’이다.
원문 출애굽기 9:16을 보면,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네가 여전히 내 백성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고 했다. 앞 부분만 보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모세처럼 바로도 세웠다.
빛과 어둠을 만드신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완악함을 어두운 배경을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모세에 대해 바로는 ‘율법적 권력’을 상징한다. 율법(律法)은 곧 법률(法律)이다. 세상적 제도앞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려고, 모세와 바로의 두 핵심자를 세워서, 10대 재앙을 연출하시고, 홍해의 기적을 보이셨다. 바로가 없었다면, 어찌 홍해기적이 있었겠는가? 이방인이 없었다면, 어찌 유대인이 있었겠는가?
로마서 9장에서 토기장이 비유가 가장 압권이다. 겉으로 보면, ‘토기장이의 갑질’처럼 보여지는데, 전혀 아니다. ‘토기장이의 긍휼’이 그대로 나타난다.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었는데, 택정함을 받은 그릇은 ‘천히 쓸 그릇’이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고,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며, ‘복음의 신비’다. 그 누가 하나님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