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을 보면, 구원을 받은 자들을 향해 “기쁨과 경고”가 동시에 주어진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2단계 칭의론”을 말한다. 복음을 믿을 때 구원증서가 발효되고, 죽어서 그 구원증서를 재확인 받는다는 이론이다. 부분적으로 맞고, 부분적으로 틀리다. 히브리서는 분명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라고 경고한다. “혹시 그의 안식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라고 이유를 밝힌다.
죄악 덩어리로서, 인간은 범죄함으로 십자가의 구원을 은혜로 영접한다. 그런데, 십자가의 구원을 영접하고서 ‘의로운 행실’을 하면서, 육신의 도덕과 착한 행위를 강조하면서, 가장 중요한 내면의 성령, 십자가의 의(義)를 망각한다. 정녕코 알라!! 도덕적 행위로서 십자가의 의(義)가 성화되는 것이 아니다. 성화(聖化)는 성령께서 그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어차피 죄덩어리다. 흙으로 만들어져서 그렇다. 흙은 잡초가 올라오고, 사람의 내면에는 죄의 잡초가 올라온다. 그래서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고, 육신의 행위는 내면의 죄를 정결하게 하지 못한다. 육신의 행위가 내면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내면의 성화는 성령께서 행하신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인가?”라고. 이 질문에서 “죄”는 무엇인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 음란물을 보는 것? 도적질하는 것? 사람을 속여서 이익을 얻는 것? “죄”는 과연 무엇인가? 육신으로 행한 죄(罪)는 육신의 죄일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죄를 행하게 하는 내면의 죄가 있으니, 그것이 탐욕(貪慾)이다. 음란물을 즐겨하고, 도적질하고,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서 살아가는 자는 그 내면이 이미 부패했다. 유념하라!! 권력의 시녀가 된 자들이여!! 뱀의 후예들이여!! 유념하라!!
성전을 건축하는 대단한 기부를 하였더라도, 그 마음에 믿음이 충만하지 않고, 세상적 의로움으로 자랑한다면, 성령이 홀연히 떠날 수도 있다. 히브리서 작가는 이것을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때 창조가 일어났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의 행위는 그저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음이여!!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들릴 때, 그 말씀이 각 사람의 심령에서 “의”로 나타난다. 비가 하늘에서 내려오듯, 의(義)는 하늘에서 주어진다.
하나님의 의(義)를 받는 방법이 “믿음의 그릇”이며, “믿음의 손”으로 붙들 수 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믿음이 인간의 믿음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어떤 충전지도 스스로 전기를 만들지 못한다. 전류를 공급받아 충전할 뿐이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의”(義)를 주셔야, 인간은 의로울 수 있다.
화폐는 한국은행에서 만든 것만이 ‘화폐’다. 그 누구도 화폐를 직접 만들 수 없다. 직접 만든 화폐는 위조범(僞造犯)이다. 율법적 의로움, 도덕적 착한 행실로서 구원을 받는 자들은 “화폐 위조범”과 똑같다. 착한 행실은 ‘봉사활동’으로서 유익할 뿐, 천국에 가는데 아무 도움이 안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향해 나쁜 행실을 할 것인가? 그러할 수 없다. 나쁜 행실을 하는 자마다 그 마음에 악(惡)이 가득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해야한다.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사라질까, 믿음으로 그 의(義)를 날마다 간직해야한다. 하나님의 의(義)는 곧 성령으로 나타난다. 성령은 마태복음 3장에 나와있듯이 한 마리 비둘기처럼 순결하다. 성령의 비둘기가 멀리 달아나지 않도록 스스로 내면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유지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