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리더: 윤혜성
기록리더 학교: 대일외국어고등학교
취재 장소: 종묘
취재 제목: 조선왕조의 뿌리, 종묘
1. 취재동기
종묘라는 장소를 교과서나 책에서 정말 많이 접했지만 실제로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옛날에 사도세자에서 종묘가 나오는 장면으로 보고 궁금증을 가졌던 기억이 떠올라 이번에 조선 왕조의 뿌리이자 모든 왕들의 신성한 영혼들이 깃들여 있는 종묘를 취재 해보게 되었다.
2. 문화재 취재내용 :
1) 조선왕조의 뿌리, 종묘
-조선 왕의 신주를 모신 곳, 정전
종묘의 정문에 들어서고 역대 왕과 왕비가 다녔다는 거칠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면 종묘의 상징인 정전 입구가 보인다. 남문을 통과하여 정전에 이르면 웅장한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가로 109m, 세로 69m의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정전은 위풍당당함을 자랑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종묘의 정전은 가로 길이가 101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이다. 정전 건물 앞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얇은 돌을 쌓아 만든 단이 있는데, 이 단을 ‘월대’, 정전의 위용을 드러내고 종묘 제례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아래쪽의 하월대가 있다. 정전의 마당인 월대를 구성하고 있는 돌은 매우 거칠고 지면도 평탄하지 않습니다. 바닥에 거친 돌을 사용한 것은 경박스럽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지면이 평탄하지 않고 경사를 이룬 것은 비가 많이 내려도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선조들의 지혜를 알 수 있는 건축술이다
정전에는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를 비롯하여 왕 19명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조선 왕조의 왕은 모두 27명이지만 공덕이 높은 19명의 왕과 그의 왕비들만 정전에 모셔져 있다.
-정전과 건축
그리고 정전은 1층짜리 건축물이다. 검은색의 지붕 그리고 붉은 기둥이 늘어선 모습이 전체적으로 엄숙하며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하지만 내부와 꾸밈은 소박하고 간결하다. 정전의 가장 특이한 특징은 화려한 부분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궁궐이나 유명한 옛 건축물들은 특히 궁궐은 대체적으로 화려하지만 종묘는 궁궐과는 다르게 단순하고 간결한 건축 양식이 돋보인다. 정전을 받치고 있는 20개의 기둥들은 모두 모양이 다 다르다. 정전을 한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늘려 짓는 과정에서 모양이 달라지게 되었다. 건물의 안정감과 시각적 효과를 높여 주기 위해 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전은 내부가 모두 트여 있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신주를 모시는 태실 위에는 유일하게 화려한 색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정전으로 통하는 문은 3곳이 있는데 각 문마다 용도도 다양했다. 남문은 영혼만 출입할 수 있고 실제로 관광할 때는 닫혀 있다. 동문은 왕과 세자, 제례를 지내는 신하가 사용하였고, 성문은 제례음악과 무용을 담당했던 악공들이 출입했다.
-제 2의 정전, 영녕전
영녕전이 만들어진 이유는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신주를 모실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세종은 정전 바로 옆 서쪽에 영녕전을 짓도록 하였다. 영녕전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하는 의미를 담고 있고,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왔다는 뜻으로 조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녕전은 16칸으로 구성 되어 있고 정전에 비해 규모도 작고 싡도 적다. 하지만 검은 기와, 붉은 기와로 이루어졌고 상월대, 하월대가 있는 등 정전과 비슷하다. 정전과 영녕전의 다른 점은 지붕의 모양이다. 지붕의 모습이 정전은 전체가 일직선인데 비해 영녕전은 중앙 태실 부분이 한 단 높게 돌출되어 있다. 영녕전은 그리고 정전에 비해 아담하고 편안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신주는 종묘에 모셔졌지만 폐위된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정전과 영녕전에도 신주가 없다. 유교를 중시 했던 조상의 공경을 실천하지 않은 왕들이기 때문에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2) 흥미진진 포인트
-신로: 종묘에는 신로가 항상 길의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신로는 신로는 죽은 왕과 왕비의 혼령만 다닐 수 있는 길로 왕도 다닐 수 없었던 곳이다. 신로는 현재 종묘에서도 관광객들이 그 길을 밟지 않도록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신로는 왕의 영혼도 끝까지 왕의 권위를 나타냄을 보여준다.
-공신당: 종묘의 정전 담장 안에는 각 임금의 공신을 모신 공신당과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슨 칠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공신당에는 83명의 대신이 배향되어 있다. 임금마다 7명 적게는 2명이다. 종묘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고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공신당 내부에는 각 임금마다 배향 대신의 신위가 여러 칸으로 나뉘어 모셔져 있어 자못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종묘제례
종묘제례는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 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의 제향 예절이다. 종묘제례는 1975년 5월 3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1년에는 종묘제례악도 함께 무형 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위는 종묘 정전, 영녕전에 나뉘어 봉안 되어 있다. 조신시대의 종묘 제향은 왕이 친림하는 대사로서 사직과 함께 길례 였다. 제사는 밤 중에 지냈으며 임금을 비롯한 왕세자, 제관, 문무백관, 악사 등 700이나 참여하는 거대한 행사이다. 종묘 제례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로, 제관들의 길고 긴 행렬부터 장엄하기 그지없다. 종묘 제례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래와 춤 음악 , 즉 가 무 악 이 함께 어우러지는데, 이는 유고 의식의 중요한 특징이다.
-종묘 제례 절차
① 선행절차② 취위③ 영신④ 행농나례 ⑤ 진찬⑥ 초헌⑦ 아헌례⑧ 종헌례(終獻禮), ⑨ 음복례⑩ 철변두) ⑪ 망료 ⑫ 제후처리
3. 느낀 점 :
프랭크 개리가 종묘를 온 뒤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한국인은 이 건물에 감사해야 한다” 라고 했다. 프랭크 개리처럼 외국의 안목 있는 건축가들도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 건축물에 놀라움과 함께 저마다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본 종묘는 사진보다 더 웅장하며 위엄이 느껴졌다. 종묘는 단순한 건축물의 구조로 관광객들을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로 압도 했다. 해외의 화려한 신전과는 달리 100미터가 넘는 맞배 지붕이 20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 앉아 불가사의 할 정도로 침묵이 감도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종묘 제례가 왕조가 끝난 뒤에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현재 유교의 중심지 였던 중국조차도 제사 문화가 사라졌다. 같은 유교문화권 대만, 일본, 베트남 모두 종묘제례의 맥이 끊어져 현재는 우리에게 배워가고 있는 처지이다. 전통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 그리고 노력이 없다면 이어질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저력이다. 조선 왕조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유교 문화이다. 조선 왕조는 유교문화의 보편성을 추구하며 독자적인 문화들을 형성해 나아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깃들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계승하고 지켜 나아 가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행동이다. 앞으로도 우리민족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 했으면 한다.
1) 문화재 이용법:
Tip: 종묘 건축의 참된 가치를 느끼려면 토요일 자유 관람을 해야 한다. 제례를 위한 부속 건물인 향대청, 재궁, 전사청은 곁에 두고 신도를 따라 정전으로 곧장 들어가야 종묘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