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미워하면서,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나의 마음으로 두가지 일을 할 수는 없다. 미움 아니면 사랑이다. 애증(愛憎)은 사랑이 아닌 미움이다. 곧 사랑의 변질일 뿐이다. 사랑한다면, 미움은 없다. 소금인가? 설탕인가? 두가지 모두 겸할 수 없듯이, 미움과 사랑이 그러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두가지 모두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내 안에 ‘미움의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성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이야기로만 읽었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계시록에 보면, 바다에서 짐승이 나오는데, 그 짐승이 바로 내 안에 살고 있었다. 즉, 미움이라는 괴물이다. 어둠은 마음속에 미움의 씨앗을 뿌리고, 그것을 몰래 키운다. 뻐꾸기알처럼. 나는 그것을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둠이 뿌린 씨앗’일 뿐이다. 미움과 증오와 시기와 탐욕과 각종 우상들이다.
원하던 일이 무너지면,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때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얼마나 무참히 짓밟혔는지, 현실이 나를 외면할 때, 그 현실 너머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가인이 그러했다.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고, 자신은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여전히 가인을 찾아가 권면하셨다. 집을 나간 탕자가 자신의 삶이 버려졌을 때, 여전히 하나님은 그 탕자를 사랑으로 기다리셨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비판과 판단과 증오심으로 살아왔다. 이게 지혜라고 믿었다. 내가 옳다고 믿으니,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반대하면, 적대자로 보인 것이다. 세상 정치인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드라마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게 비쳐진다. 그러니, 나의 행동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의 허물이 보일 때, 그 작은 틈새를 덮어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이 있는가? 있다면 사랑이다. 그러나, 그 틈새를 기어이 판단하고, 지적하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켜 그 사람을 바꾸려는 그런 마음은 고집이며, 권력행위이며, 미움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사람은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기때문이다.
미움!! 내가 일하는 공주 현장에는 큰 개가 한마리 있다. 그 녀석은 목줄이 묶여져 있고, 쇠사슬은 2m 정도 된다. 2m 원의 반경을 벗어날 수 없다. 주인이 그 쇠사슬을 잡고 잠시 산책을 하면 그때 주인의 걸음을 따라 움직일 수 있다. 미움이 이렇다. 사람을 미워하면, 그 감정의 쇠사슬에 묶여, 말뚝이 박히고 만다. 어디를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다.
내가 누구를 지적하고, 서운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면, 그것은 결국 싫어하는 마음이 된다. ‘미움의 괴물’은 판단과 비난과 욕설과 증오심을 먹고 사니, 마음속에 있는 그 짐승은 살이 돼지처럼 쪄서 비대해지고, 강성해질 것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속에서 분노가 들끓게 된다. 바다에서 짐승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미움의 씨앗을 없애야 한다. 미움은 마음의 세계여서,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주님의 은혜로만 없어진다. 미움은 괴물이라서, 쉽게 떠나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미움의 존재가 떠나면, 그때 완전한 사랑이 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