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장창훈 기자]=지금, 정안IC다. 11월 13일 월요일 오전 7시 3분전, 우동 한그릇을 먹고, 차에서 노트북을 펼친다. 내 머리속에 펼쳐진 어제 그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보다 영화스럽고,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했던 설교였다. 김성로 목사님! 죽은 나사로처럼, 죽음 직전까지 가서 다시 돌아와, 그토록 함께 기도해준 성도들을 만나려고, 성탄절에 나타났다가, 이후 교회 공동체 조직의 현실을 보며, “이사야의 심정”으로 “내가 괴물을 키웠다”고 대성통곡하며, “자기 자신만 구원받고 죄사함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구원파와 다를바 없다”며 본인과 자신의 측근부터 초대교회의 그 가족공동체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어머니인가? 여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어머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생각났다. 과연, 성령의 태어난 자들은 혈연과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태어난 자들이라고 요한복음은 증언한다. 성령으로 태어나, 하늘의 품속에, 하늘의 가족에 속한 자들, 그게 실현 가능할까? 복음서는 초대교회가 그렇게 살았다고 증언하니, 김성로 목사님을 비롯해, 춘천 한마음 교회는 초대교회를 표대삼아 지금껏 외길을 걸어왔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나신 예수님과 연합을 목표로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과연 교회 공동체가 혈연의 가족보다, 혹은 그 가족만큼 소중한가? 그 부분에서 걸렸던 것이다. 부자청년은 너무 많은 재물, 가령 성공한 젊은 사업가에게 100억은 엄청난 금액인데, 예수님이 “회사 팔고, 내 가족이 되렴, 내 제자가 되렴, 그게 인생이란다, 그게 영생을 받는 길이란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한사코, 김성로 목사님은 ‘예수님과 연합’을 말씀한다. 그게 쉽고 간단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좁은 문이다. 나를 버리고, 우리로 다시 태어난다는 그 연합의 비밀이, 창세기 3장에 있다. 아담이 잠들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 그 창조는 비유였으니,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연합하는 비밀을 그곳에서 발견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예수님의 몸이며, 아내다. 남편이 아내를 향해 “내 몸, 자기”라고 말하듯, 주님은 교회를 “내 아내”라고 부르신다. 그 교회속으로 들어와, 주님과 함께 하나되는 것, 세상에서 추구했던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큰 사랑만이 나타나는 곳, 심장이 몹시 떨렸다. 초대교회는 과연 그렇게 살았으니!!! 내 어머니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내 남동생이 잘되면, 내가 기쁘다. 그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다. 가족의 울타리가 가족으로 한계까 지어져서 그러하다. 교회 안에서 과연 어떠한가? 지극히 약한 지체, 새끼 손가락이 아프면, 전체가 아플까? 그러하다면, 그 공동체는 생명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일 것이다.
교회 안에 작은 교회가 춘천 한마음 교회에 있다. 줄여서 ‘작교’라고 부른다. 작교 모임은 가족끼리 모이듯 그렇게 자주 있고, 참새처럼 서로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소통과 대화를 ‘교제’라고 부른다. 마음은 말하지 않으면 ‘암흑상자’이므로, 말하는 순간 암흑상자는 투명해진다. 그래서 한마음 교회는 언어의 은사가 있는 것 같다. 언어의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 ‘마음속 솔직함’을 원칙으로 하고, 상대의 허물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것도 원칙으로 한다. 간증으로 쏟아지는 성도들의 참회를 들으면서, 나도 진솔해지고 싶어졌다.
늘, 즐겨 보던, ‘연인’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풀려나서, 고향에 돌아왔는데, 이혼을 당했다. 그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가,
“나는 가난한 길채, 부유한 길채, 발칙한 길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길채, 나를 사랑하는 길채, 그 어떤 길채라도 좋아. 길채니까”
그때, 그 여자가 머뭇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
“안아줘야지,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사랑하는 주님! 작은 교회에서 작은 아이가 모자이크를 붙이는 놀이를 했다. 알갱이들을 모자이크대로 붙였는데, 그게 순간 ‘연합’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주님께 붙으면, 주님의 몸에 붙으면,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으니, 나도 주님의 몸에 붙었으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것과 같고, 주님을 머리로 삼았으니, 나는 하늘에 속한 자가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왔다. 남자에서 여자를 만든 그 창조비밀이 ‘공동체’라는 생명체를 지금도 빚어가는 하나님의 오묘한 사랑이었으니!!!
눈이 보면 손이 움직이고, 마라톤을 한 발 때문에 머리가 면류관을 쓰고….. 결국 주님의 모든 것이 내가 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 이신칭의가 공동체 연합속에서 실현된다. 현대사회의 이기주의가 공동체의 생명력을 희석시켜서, 어리석게 나를 위해 살았던 지난 삶이었던 것 같다. 마태복음에서 왜 그토록 비판하지 말라고 했는지….. 교회 공동체를 비판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에 자해하는 것과 똑같은 것인데….. 누군가의 허물이 보이면, 공동체적으로 그건 내 허물이며, 주님의 허물인 것인데…. 주님은 허물 많은 나를, 우리를 받으셨다는 그 사실을 마음에 담는 시간이었다.
수요찬양 집회 영상을 보는 시간이 있었다. ‘공동체의 연합’의 말씀을 듣고서 봤는데, 나는 오랫동안 찬양단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런데, 찬양단과 내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그 관점으로 마음을 바꾸니, 찬양단 10명이 열손가락처럼 보이고, 나도 함께 손가락을 올리면서 몸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한 몸, 한 공동체로 주님을 찬양하는 시간인 것이다. 춘천 한마음 교회를 통해, 제4의 인류, 곧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공동체’의 생명체를 보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