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더 : 장민정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한 학기하고도 반이 지나고 드디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유리의 성, 에코랜드와 같은 사진 찍기 좋은 곳들과 감귤 따기와 같은 활동적인 체험들 사이로 4.3평화기념관이라는 일정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제주 4.3 사건. 나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육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평화와 독립을 위한 제주도민들의 희생. 나는 4.3평화기념관에 방문하여 그제야 그 사건에 대해 더 깊숙이 알 수 있었다.
4.3평화기념관에 방문하면 10분이 조금 못 되는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다. 그 영상 속에는 4.3의 시작과 끝,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 이야기가 담겨있다. 4.3은 1947년 삼일절 행사 직후 시작된 가두시위를 기점으로 했다. 시위대가 지나간 길목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의하여 어린 아이가 치여 다쳤으나, 이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간 경찰에 분노한 사람들은 경찰들을 향해 돌을 던졌고, 무장경찰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 이로 인해 여섯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고 4.3 사건의 도화선이었던 3.1사건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1947년 3월 10일부터 시작되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으로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정했다. 많은 응원경찰들이 파견되었고, 남쪽으로 월남(越南)한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을 장악했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계속해 민심을 자극시켰다. 당시 대한민국은 예정된 5.10 선거, 즉, 남한 단독 선거로 인해 분단이 거의 확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단독 선거를 반대하여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고 350명의 무장대는 12개의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습격했다. 그들은 미군의 즉각 철수, 망국 단독선거 절대 발대, 투옥 중인 애국자 즉시 석방,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즉각 철수, 이승만 매국도당 타도, 경찰대와 테러집단 즉각 철수, 한국통일 독립 만세를 외쳤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5.10 선거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는 동안 4월 28일, 미군정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사흘 뒤 5월 2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 사건’이 벌어졌고, 5월 3일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협상은 깨져버렸다. 경찰은 오라리 마을에서 경찰의 후원 ‘아리 우익청년단원들’이 방화한 것을 무장대의 방화로 몰아갔고,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결국 제주도 2개 선거구를 전국에서 유일하게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시켰던 무장대는 미군정에 의하여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해하는 불순세력으로 몰렸다.
미군정은 미군 대령을 제주도 총사령관으로 보내 검거작전을 실시하여 6.23 재선거를 시도했지만, 그 또한 실패하자 강경 토벌작전을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제주도민들이 집단 희생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정부는 제주도 사태 진압을 목적으로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고, 대대적인 강경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었다. 10월 11일 제주도에는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간산지대를 통행하는 자든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된 이후부터 군경토벌대는 마을들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생했다.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중간산마을뿐만 아니라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폭도로 지목되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군경토벌대만이 학살을 저지른 것 같겠지만, 사실 무장대들 또한 해안마을을 습격하여 경찰 가족과 우익 인사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을 자아냈다. 무장대와 정부, 그 사이에 끼어있던 민간인들의 희생은 끊이질 않았다.
1949년 3월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방침의 선무공작이 전개됨에 따라 한라산에 피신해있던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산했으나, 선무공작 방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1,600여 명이 총살당하거나 형무소로 보내졌다. 그해 6월 무장대는 궤멸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예비건속자와 형무소 재소자들이 다시 희생되었다.
7년 7개월 간 이어졌던 제주 4.3 사건은 제주 인구의 10%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았고, ‘곤을동’, ‘어우눌’, ‘리생이’를 포함한 109곳의 마을들이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로 남았다. 살아남은 이들도 팔다리를 쓰지 못하고, 허리가 비틀어지고, 뼈가 틀어지고, 총에 맞아 턱을 잃어 아픈 기억을 몸에 품고 살아갔다. 다랑쉬굴에서는 수많은 유해들이 발견되었고,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옆에서는 유해 388구가 발견되었다. 4.3 사건은 일본으로 넘어간 무국적자 김석범에 의해 쓰인 소설 <까마귀 죽음>, 그리고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물렀다.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 4.3 특별법)은 2000년 1월 국회를 통과하여 진상 규명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 회복으로 인권신장, 민주발전, 그리고 국민화합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19년 6월에는 UN본부에서 제주 4.3 인권 심포지엄이 열려 더 많은 이들에게 이 사건의 심각성을 알렸다.
관람객들은 4.3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으며 이제껏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 잘 몰랐던 것을 죄송하게 여겼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제주 4.3사건을 알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4.3평화기념관 내에 희생자들의 사진이 빼곡이 붙어 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이 가장 의미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글과 그림으로만 보면 그저 먼 과거의 비현실적인 일으로 느껴지는 이 사건이 희생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면 그제야 살갗으로 느껴진다. 그제야 백 년이 채 되지 않은, 멀지 않은 과거에 살아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임을 깨닫는다. 희생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다보면, 그들의 얼굴이 조금도 낯설지 않아 나와 안면을 텄던 이가 희생당한 듯해 마음이 아파온다.
4.3은 많은 희생자들을 낳은 아픈 역사인데, 희생자 수에 비해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조차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으니까.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알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제주도뿐만 아니라 서울과 같이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도 이 사건을 알리고 기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제주공항에서 343번, 344번 공영버스를 타고 제주4·3평화공원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공원과 함께 있는 4.3평화기념관을 방문할 수 있다. 참고로 평화공원에는 위령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