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3.1절 특집 공동취재단]=3.1만세 운동 101 주년, 무오독립 102 주년을 맞아 대종교 총본사에서 독립운동 단체와 언론 관계자를 초청하여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시절이 허락하지 않아 SNS로 발표한다.
戊午년 독립 운동 ! 重光團 선언 !
“우리나라의 털 끝만한 권리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수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라도 이민족이 점령할 권리가 없으며,
한 사람의 한국인이라도 이민족의 간섭을 받을 의무가 없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 무오 독립선언서 –
1919 기미년 3월 1일 정오 !
한 머리 땅 전체를 울린 소리가 있었으니 세계 식민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거족적이고 거국적이며 동시 다발적인 평화 만세 운동 !
아무리 축소 조작하려 해도 그 가치는 많은 전 세계 사람들이 인정한다. 비슷한 시기에 간디가 주도한 사티아그라하<진리를 찾으려는 노력> 무저항 불복종 운동에도 영향을 준 듯하다.
3.1 만세 운동 보다 1개월 앞선 2.8 독립선언 그러나 그 것 보다 3개월 먼저 북만주 십리평 잣덕에서 대종교 중진을 주축으로 무장 투쟁을 선언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그것이 무오 독립 선언이다. 1918년 11월 13일 길림성 화룡현 대종교 총본사에서 발표하였다.
총 참가자 39명 중 김교헌과 유세복은 대종교 종사로 2대와 3대 교주이고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김학만, 여준, 이광, 이대위, 이상룡, 이시영, 박성태, 박용만, 박찬익, 이탁은 서일의 북로군 정서와 관계가 깊으며, 정재관, 이동열,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손일민, 이세영, 문창범, 최병학, 이종탁, 이봉우, 황상규는 대종교 간부들이고, 박은식, 신채호는 김교헌의 제자이다. 신성은 신규식, 조욱은 조성환, 김이주는 김약연으로 대종교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허적은 왕산 허위의 아우 허겸으로 밝혀졌고 한진은 대종교인들이 상해에서 조직한 동제사의 회원이며, 조용은은 조소앙의 본명이다.
안창호, 안정근, 이승만은 기독교인으로 참여는 하지 않았고 이름만 올렸다. 위 분류는 대종교 중광 60년사를 참고로 필자가 직접 조사한 것으로 매우 신빙성이 높다.
이봉우, 임방은 아직 어느 소속인지 밝히지 못했지만 서상용이라는 사람이 근래 발견되어 이봉우 또는 임방이 서상용이라면 무오 독립선언서 39명 중 34명이 대종교인이 된다.
3.1 운동은 국제적으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은 대종교 시교사 신규식이 상해에 창당한 신한청년당 독립지사들에게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총독부의 무단정치에 항의하기 위하여 애국지사들이 뜻을 같이하였고,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백성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하였다. 김규식은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영어가 유창했다.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여 독립 청원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김규식에게 맡기면서 3.1 운동은 시작되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통치를 경험한 조선의 유림들은 조선 민족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항일의식을 지속적으로 표출하기 위하여 북만주에 자리 잡은 대종교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곳에는 대한 독립의 아버지 홍암 나철 대종사를 비롯한, 민족사와 국학의 시조 무헌 김교헌 시교사가 있었다. 그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군사교육을 통해 향후 봉오동, 청산리, 대전자령 등에서 무장투쟁의 선봉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팔도에서 의병투쟁을 이끈 의병장들이 포진해 있어 무오년 대한독립 선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13도 창의군 의병장 이범윤, 경기 의병대장 홍범도, 경성의 삼한 갑족 이시영, 이시영의 참모 이동녕, 의병 사령관 조성환, 경상도 이상룡, 의병 수령 윤세복, 평안도 이탁, 경상남도 의병대장 허혁, 서간도 양기탁, 충청도 이세영과 이종탁, 경성의 김교헌과 여준, 평안도 참령 이동열, 상하이 신규식, 신채호, 현천묵, 명제세, 시베리아 문창범과 이동휘, 블라디보스토크에 김규식, 미주에 김용만, 김대위 등이 세계에 흩어진 애국지사들이 대종교 홍암종사의 영향 아래 모여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던 1918년, 동도본사의 신규식 시교사는 한국 독립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의 기운이 무르익는 것을 비롯,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만주로 박찬익 시교사를 보내 대한독립 의군부의 대종교 독립 운동가들을 소집했다.
몽양 여운형의 숙부인 여준(呂準)이 주석을 맡고 박찬익은 외무를 담당하였다. 의군부 간부들이 역할을 분담해 만들고 배포한 문서가 바로 대한 독립선언서다. 박용만은 이를 영문으로 번역해 하와이에까지 배포했다. 오늘날 영문본이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등에 전해 내려오는 이유다.
3.1 만세 운동 보다 1개월 앞선 2.8 독립선언 그러나 그 것 보다 3개월 먼저 북만주 십리평 잣덕에서 대종교 중진을 주축으로 무장 투쟁을 선언한 것이 戊午 독립선언이다.
大韓 독립 선언서라고 하며, 1919년 12월 16일 (무오 1918년 10월 24일) 길림성 화룡현 大倧敎 총본사에서 김교헌과 조완구가 초안을 작성하여, 무오년 11월 13일 길림성 화룡현 대종교 총본사에서 발표하였다.
1919년 1월 24일(음력 1918년 12월 23일), 상하이의 비밀결사조직 동제사(同濟社)의 수장 신규식으로부터 미주, 상하이, 일본, 국내 등 각 지역에서의 기밀(機密) 독립선언 활동에 대한 상황을 전달하고자 박찬익은 봉천(奉天)을 떠나 길림(吉林)으로 잠입했다. 동제사 요원 박찬익과 정원택은 신규식의 밀명을 따라 서간도와 북간도의 독립 운동가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하였다. 일본을 담당하는 동제사 요원 조용원이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한창 2·8독립선언을 모의하느라 분주할 때였다. 2차 비밀 요원 장덕수가 1월 27일(무오 12월 26일) 상해를 떠나 2월 3일 동경에 도착하였다.
1월 27일(무오 12월 26일) 여운형의 숙부 여준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한 대한독립 의군부가 조직됐다. 나이가 가장 많은 여준이 총재로 추대되고, 총무 겸 외무에 박찬익, 재무에 황상규, 군무에 김좌진, 서무에 정원택, 선전 겸 연락에 정운해 등이 피선됐다. 상하이에 파견할 길림 대표로는 조소앙이 선정되어, 조완구가 초안을 잡아 조소앙이 작성하고 김교헌이 감수한 무오독립 선언서의 인쇄 및 발송을 1월 28일(무오 12월 27일)에 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장 출신인 여준의 집으로 서간도와 북간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2월 동경에서 2.8(음력 1919년 1월 8일) 독립 선언서가 발표 되자 대종교 총본사가 있는 화룡에서 지린, 상하이, 서간도와 북간도, 미주, 노령 등 국외의 독립운동 지도자급 39명이 서명한 무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상하이에서는 지역별로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 정세를 설명하고 시위를 조직하도록 했으며, 김규식의 처 김순애는 대구 지역을 담당하여 백남채 등 기독교 인사들과 만난 뒤 상경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이 재직 중이던 세브란스병원은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3·1 운동 연락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함태영과 접촉하여 평양에 파견되었다가 거사일 전날인 2월 28일 중국으로 탈출했다.
국내의 애국지사 월남 이상재와 의암 손병희에게도 밀서를 전하기 위해 비밀 요원 방효상과 곽경이 움직였다. 동제사 비밀 요원 선우혁은 평북 선천(宣川)의 목사 양전백, 정주의 이승훈, 평양의 길선주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과 거사 자금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기미 1월 29일) 기미 독립선언서가 우여곡절 끝에 발표되었다.
기미 독립선언서가 평화적이고 비 폭력을 표방한 국내의 각 종교 대표자 33인이 중심이라면, 무오 독립 선언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조국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는 각계 인사들이 중심이 된 최초의 대일 무장투쟁의 선언으로 조국 광복 전쟁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한 실질적이며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 선언으로 세계 독립 투쟁사에 그 이례가 없는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무오 독립 선언에 대하여 예전 보다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종교에 전하는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 다르다. 그것이 우리가 친일파를 청산 못한 부작용이다. 친일파들이 제일 두려워 한 것은 독립 운동가들이며, 그 중에서 무장 독립운동의 주체인 대종교를 가장 두려워 하였다. 홍익대, 국민대, 단국대, 국학대, 신흥대, 한국대 등 대종교에서 세웠거나 대종교 간부들이 세운 대학을 친일파에게 모조리 빼앗긴 여파가 지금 우리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3.1 운동 101 주년 맞아 모든 악은 친일파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민족 정기를 올 바로 세우고 민족 역사를 바로 찾아야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는 선조가 될 것이며 진정한 대한 독립이 완성될 것이다.
무오년 독립 운동 ! 중광단 선언 !
“궐기하라 독립군!”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대한은 대한으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 지어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
“한번 죽음은 사람이 면할 수 없는 바 죽음을 바쳐 나라를 구하면 2000만 동포가 다시 살고, 삼천리 옥토가 우리 것으로 돌아오니 희생하고 또 희생하라!”
“우리나라의 털 끝만한 권리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수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라도 이민족이 점령할 권리가 없으며, 한 사람의 한국인이라도 이민족의 간섭을 받을 의무가 없다.”
– 무오 독립선언서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