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씨의 무표정한 얼굴 클로즈업. 그리고 바로 옆 또렷히 새겨진 광고카피와 내레이션. 나지막하지만 절절한 목소리로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널브러지다’ 의 사전적 의미를 몸소 실천하며 가까스로 TV 리모콘만 까딱이던 내 눈 앞을 스쳐간 그 광고를 보며, 나는 일만분의 일초 간격의 엄청난 반사신경을 발휘하여 소리쳤다. “나도!” 그리고는 금년 최고의 광고카피가 나왔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날부터 출근을 해도, 친구를 만나도 우리 모두는 같은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딱히 예전보다 일이 많아지고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바쁘다. 머리는 늘 무겁고 스트레스는 쌓여만 간다. 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안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면 스스로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불안해하며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 중요한 메일을 확인하지 못할까봐, 친구의 메신저에 재깍 답해주지 못할까봐, 모두가 알고 있는 새로운 뉴스를 나만 놓쳤을까봐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심지어 이 모든 것들을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며 동시에 하기도 하는 훈련된 멀티플레이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 24시간 중 스마트폰, PC, 노트북, TV 를 보고 있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채 3시간 이상이 되지 않는다.
멀티플레이어가 한창 뜨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그리고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요즘 멀티플레이라는 말은 말했다시피 너무나 당연해서 왠지 좀 촌스럽고 구식으로 들린다. 지금은 하나를 해도 뭔가 남다르게, 기발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창조/창의형’ 시대다. 물론 이도 언젠가는 촌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능력이 참으로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24시간 과부하 상태로 돌아가는 두뇌에서 과연 창의적인 생각이 나올 수 있을까? 나의 경우엔 절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하루 중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정도 머리를 식히는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 중에는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다른 무엇도 보거나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머리를 비운다. 실제로 내 글이나 그림의 소재는 이런 비움의 시간에 또는 그 이후에 떠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종 ‘명상’ 이라는 거창한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동의어로는 ‘멍 때리기’ 가 있을 수 있겠고 결국 그냥 가만히 생각을 비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기사를 보니 서울 광장 앞에서 ‘멍 때리기 대회’ 가 열렸다고 하는데 뇌를 쉬게 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뇌를 혹사시켰으면 이런 대회가 다 생겼을까 싶다.
그러니, 좀 쉬자. 오늘만큼은 불안해 하지 말고 격렬하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