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와 중명전
문화리더 이름 : 윤정연
문화리더 학교 : 인수중학교 2학년
취재 날짜 : 2016년 7월 23일(토)
취재 장소 : 서울 중구 정동길 41-11 덕수궁 중명전
취재 제목 : 중명전을 다녀와서
1. 취재 동기 : 경북궁 등 여러궁들을 다녀와보았지만, 덕수궁은 가보지 않아서 중명전에 다녀왔다.
2. 문화재 취재내용 : 중명전은 대한제국시대에 있었던 2층 벽돌집이다. 중명전의 첫 이름은 수옥헌이다.
1897년 경운궁을 황궁으로 지정하고 건축 공사를 진행하던 중 경복궁의 집옥재와 같은 도서를 비롯한 보물 창고 개념(황실도서관 용도)으로 계획되어, 1899년경 준공되었다. 준공 당시에는 서양식 1층 건물로 설계는 군사교관으로 초빙되었던 미국인 육군소장 출신 다이의 아들이자 한성부 건축기사로 고빙된 다이가 설계하였다.
1901년 주변 건물인 문화각과 정이재, 외 화보와 함께 화재로 인해 전소된 후 정면과 양측면의 3면에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이 때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하였다. 그러나 1925년 다시 화재에 발생하여 외벽만 남기고 소실 되버리자 건물의 형태를 변형하여 재건하였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2009년 변형된 건물의 형태를 되찾는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대한제국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특히, 1904년 경운궁 대화재(大火災)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다. 을사늑약의 선봉 역할을 한 일본 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주한공사와 주차조선사령관 등과 함께 중명전에 머물던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였다. 고종은 끝까지 조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였나 중명전에 연금된 상태였던 대신들을 회유, 겁박하여 결국 목적을 달성하였다. 을사늑약의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이 분노와 좌절에 휩싸여서 전국적으로 투쟁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헤이그특사 파견 당시 고종이 주목한 점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이 상호 모순된 점이었다.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약속했지만, 불과 1년 뒤의 ‘조약’에서는 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여 전년도의 조약을 스스로 위배하였다. 또한 고종은 세계 각국이 만국평화회의에서 표방한 정의, 평화의 구호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헤이그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된 것이라는 것과 무효화 되어야 함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의 밀사는 고종의 특명을 수행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대신 만국기자단협회에 일본의 국권침탈과 을사늑약의 무효에 대해 알리며 여론에 호소하였다. 그 내용이 현지의 신문에 알려졌고 동정적인 여론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을사늑약 무효화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1907년 7월 3일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와 함께 입궐한 이토는 고종황제에게 ‘밀사파견과 같은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거든 차라리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수락하지 않았고, 퇴위를 당하였다.
한편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3. 취재도중 만난 사람과 인터뷰 :
학생인 16살 윤이나씨와 인터뷰를 했다.
1. 이곳에 오게 되신 계기가 무엇인가요?
답: 학교숙제를 하러 왔습니다.
2. 중명전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
답: 헤이그 특사를 파견 한 것을 알게 되었고, 중명전의 첫 이름, 누가 설계했는지 등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4. 느낀 점 : 덕수궁 안에 있는 중명전은 대한제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끝까지 조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였나 중명전에 연금된 상태였던 대신들을 회유, 겁박하여 결국 목적을 달성했었다. 이렇게 중명전에서 헤이그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된 것이라는 것과 무효화 되어야 함을 천명하고자 했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의 밀사는 고종의 특명을 수행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대신 만국기자단협회에 일본의 국권침탈과 을사늑약의 무효에 대해 알리며 여론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 무효화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중명전에서 많은 역사가 일어났으니까 여태까지 중명전에 대해 몰랐던 것을 더 찾아보고, 더 알아보고 싶다. 8월 1일부터 중명전 공사를 하는데 공사가 끝나고 새로워진 중명전을 보러 갈 것이다.
5. 문화재를 찾아가는 교통편 :
–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정동극장 방면 1번 출구
–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정동극장 방면 12번 출구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경향신문사 방면 5번 출구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덕수초등학교 방면 6번 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