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 출장기 2]
“어디? 어디간다고?
“미얀마가 어디지, 도시인가?”
“너, 괜찮겠어?”
나의 출장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이들의 관심과 우려를 샀던 미얀마. 친한 친구는 외교부 웹사이트를 카톡으로 보내며 말라리아 주사 꼭 맞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아버지는 미얀마의 옛 이름 버마(Burma)와 함께 해묵은 공산주의 역사를 읊으셨다. 그리고 열이면 열 걱정스런 표정과 함께 하던 말.
“조심히 다녀와”
하아. 약간의 기대와 그보다 큰 심란한 마음을 부여잡고 KE 472 에 올라탔다. 멕시코, 필리핀 연이은 출장에 지쳐 있었기에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심정으로.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나의 여권과 컴퓨터 모니터를 번갈아 가며 보는 입국심사원을 향해 최대한 선량하고 무고해 보이는 자세와 표정 – 희미한 미소를 시도했으나, 전혀 미소처럼 보이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 과 함께 날 제발 보내주오 라는 눈빛을 발산한 지 5분여. 철커덕 도장 찍힌 여권을 빼앗듯 건네 받고 나서 돌아보니 양곤 공항은 너무 작았다. 비행기 착륙부터 호텔 운전사를 만나기까지 20분이면 충분했다.
불현듯 멕시코로 환승할 때 거쳤던 LA 공항과 입국심사원의 속사포 질문,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떠올랐고, 거기에 비하면 미얀마는 천국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양곤의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볼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한 채.
그날 밤 호텔에 던지듯 짐을 내려놓고 어여쁜 호텔리어의 추천을 받아 찾아간 바, Roof Alchemy 는 신세계 그 자체였다. 이 곳이 아버지가 말했던 공산국가(물론 과거이지만) 양곤이 맞나 싶을 만큼 쿵쾅거리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음악과, 화려한 조명, 난생 처음 보는 수 많은 종류의 칵테일, 맥주, 알코올들. 그리고 그 속에서 물 담배를 뻐끔거리는 젊은이들에게서는 여유로움이 넘쳐 흘렀다.
아마 근처 대학교를 다니는 일부 부잣집 자재들 일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는 개발도상국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부정적인 느낌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취업과 사회생활에 지친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여유, 따뜻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홀리듯, 꿈꾸듯, 그렇게 그날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일정이 시작됐다. 택시를 타고 회의 장소로 이동하는데 택시 기사가 조그마한 나뭇잎에 쌓인 무언가를 잎에 넣고 오물오물 거린다. 길거리 여기저기에서도 똑같은 것을 바구니에 넣고 팔고 있길래, 여기 사람들의 아침 식사인가 싶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기사가 문을 여는 게 아닌가. 왜 도로 한가운데에서 문을 여나 내심 놀라 쳐다봤더니 퉤퉤 침을 뱉는다. 나 참. 뭔 침을 저렇게 뱉나 불쾌한 마음에 외면했다.
무사히 첫 번째 회의를 마치고 나와 길거리에서 잠시 돌아가는 택시를 기다리는데 거리 여기저기서 퉤퉤퉤 침을 뱉는다. 미얀마는 유난히 침 뱉는 사람이 많구나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뱉는 침이 빨갛다. 화들짝 놀라 옆에 있는 이사님께 저 사람 입에서 피를 토했다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더니 내심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신다.
나중에 현지 통역사에게 아무래도 이상하여 미얀마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침을 많이 뱉느냐 물었더니 씹는 담배 때문이란다. 택시 기사의 아침 식사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이 씹는 담배였고,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500원인데 그게 한참 씹고 나면 빨간 색으로 변한단다. 피가 아니라 담배였던 것. 이 사실을 듣고 나서 길을 유심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씹고 난 담배의 흔적이 빨갛게 흩어져 있었다.
미얀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은 쉐다곤 파고다에서였다. 양곤에 오면 꼭 봐야 한다는, 2500년 전에 지어진 이 탑은 어마어마한 양의 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 있는데 높이가 약 100m나 되어 그 찬란한 금빛을 미얀마 시내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밤에 본 쉐다곤 파고다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예쁜 것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너무나 오묘하고도 경건한 아름다움이었다. 맨발로만 입장이 가능한 쉐다곤 파고다에는 외국인도, 현지인도, 스님도 각자가 무슨 종교를 지니고 있든 파고다의 높은 위엄 앞에 겸손해지는 힘이 있었다. 마치 나의 존재가 파고다의 금빛 커튼 안에 따뜻하게 감춰지는 것 같은 느낌. 어떤 존재이든, 어떤 생각을 하든, 빛으로 비추면 사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2 시간 가량 파고다 주변을 돌며, 오랜 출장 기간에 쌓였던 피로와 복잡한 마음을 쓸어 내렸다.
미얀마에서 돌아 온 지 이제 고작 이틀. 너무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어서 며칠 꿈 꾸었던 거라 스스로를 속여도 믿을 듯한 그 아득한 날들이 벌써 그립다. 미얀마는 더 이상 내게 말라리아 주사가 필요한 곳도, 위엄한 곳도, 공산국가 버마도 아니다. 그저 금빛 따뜻한 느낌이 가득한 꿈 같은 곳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