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을 이름짓다
한국문화 알리기 문화탐방 취재일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다녀왔어요
기록리더 이름 : 윤성희
기록리더 학교 : 서울국제고등학교 2학년
취재 장소 : 배재학당, 이화학당
취재 제목 :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다녀와서
1. 취재 동기 : 학교 역사 수업시간에 우리나라의 교육 기관들에 대해서 배웠다. 문화, 사회, 교육, 인권 등에 관심이 많은 나는 여성들을 위한 최초의 학교인 이화학당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이화학당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부근에 있는 배재학당도 다녀왔다. 배재학당은 선교사가 한국에 세운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데, 서양식 교육방식을 좋아하는 나는 이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방문하게 되었다.
2. 문화재 취재내용 : 제일 먼저 간 이화학당은 여성들을 위한 최초의 학교였다. 당시 조선시대의 교육제도와 내용은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갔지 여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여성들의 인권은 주로 침해되었으면 이는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가 1886년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튼 부인이 한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1887년에 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시작됐다. 이화학당은 한국의 여성교육의 시발점이자 여성 지도자를 다수 육성한 곳이다. 1885년 6월에 조선에 입국한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은 선교사업의 중요한 부분으로 한국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우기로 했다. 그녀는 초가집 열 아홉 채들을 고치고 그 옆에 있는 공터에 이화학당을 짓기 시작했다.
1886년 5월 31일 밤 드디어 한 여성을 그녀는 학생으로 맞이했다. 그녀는 학생의 어머니에게 학생의 신변을 보증한다는 서약서까지 주고 입학시킨 것이다. 서약서의 내용 중에 스크랜튼은 자신이 학생을 데리고 조선 안에서라도 단 십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겠다고 서약하겠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사실 스크랜튼 부인은 처음에 양반집의 자녀를 학생으로 구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에는 가난한 집의 아이와 고아를 학생으로 얻었던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여학생이 들어온 것은 큰 기쁨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의 여학교가 된 것이다.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났을 때, 명성황후는 친히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주고 외무독판 김윤식을 통해 편액을 보내왔다. 당초에 스크랜튼 부인은 교명을 전신학교라 지으려 했으나, 명성황후의 은총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이화’로 택하였다. 이는 당시 황실을 상징하는 꽃이 순결한 배꽃이었는데,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성을 상징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화학당의 교육이념은 ‘보다 나은 한국인’이라는 사상 위에 이를 향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이는 스크랜튼 부인이 이화학당의 목적과 교육방침을 말할 때, 학생들의 생활 전체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시점보다 더 나은 한국인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1897년 이화학당의 경우만 보더라도 학생들이 한문을 정규 과정으로 넣어 달라고 학교당국에 요청하였다. 그 이유는 남자들은 한문을 배우는 데, 왜 여자들은 배우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의 여학교 교사는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1893년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초기 여학교에서의 각 학과 담임선생은 모두 여선생들이었다. 이는 한국 풍속에 의하여 여자가 남자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문 담당만은 남자선생이 맡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한문 담당의 남자 선생은 여학생을 마주 보고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뒤로 돌아 앉아서 여학생이 묻는 것에만 뒤돌아 앉은 채 대답을 해 주는 식으로 학생을 가르쳤다. 이 수업을 보면 비록 여성들의 권위가 비교적 높아지긴 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들과 같지 않았을 때의 풍습이 아직도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배재학당이다.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의사 스크랜튼의 집 한 채를 산 다음 방 두 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고종의 지원으로 1886년 6월 8일 인재를 배양하는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액을 받아서 학교를 설립했다.
배재학당은 기독교 정신과 개화사상에 근거하여 근대 교육을 시작하였다. 근대 문명의 지식을 주고 과학을 이해하도록 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일군을 기르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러기에 배재학당의 교육 목적은 기독교인 양성과 근대 국가의 인재를 배양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배재학당에서는 성경과 영어를 비롯하여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근대 교육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또한 매우 근대적인 교육뿐 만이 아니라 서양식 운동인 야구, 축구, 농구 등을 가르쳤으며 연설회나 토론회 등을 장려했다.
배재학당의 수업료는 매월 3량이었고, 학비가 없는 학생에게는 일자리를 주어 자신의 힘으로 벌게 하여 자립정신을 길러 주려고 하였다.
3. 취재도중 만난 사람과 인터뷰 : 학교 보고서 작성을 위해 배재학당을 방문한 임시우 학생과 인터뷰를 했다.
질문1: 이 곳을 방문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답1: 이곳을 지나가다가 부모님께서 이 근처에 역사적인 곳들이 많다고 하셔서 방문하게 됐습니다.
질문2: 배재학당에 와서 무엇을 느꼈나요?
답2: 고종이 직접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만든 학교라는 점도 신기했습니다. 선교사라면 교회나 성당부터 지을 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4. 느낀 점 : 우선 나는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위치해있는 정동의 자체부터 너무 감사했다. 근∙현대 역사의 산물이 모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방문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내가 관심이 있는 교육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뿐더러 한국의 교육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특히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들의 높아진 지위와 위상을 보여줘서 여성 인권과 성차별의 해결 등을 매우 중요시하는 내게 감격스러운 곳이었다. 배재학당도 역시 내게 감동을 줬는데 그 이유는 내가 개방적이고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서양식 교육방식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학교에서 서양식의 교육방식이 도입된 교육과정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재학당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결론적으로, 역사의 장소들이 꾸준히 유지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줬으면 좋겠다.
5. 문화재를 찾아가는 교통편 :
이화학당: 시청역 또는 서대문역에서 내린 후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한다.
배재학당: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로 나와서 서소문 방향, 대한항공 빌딩을 지나 직진한 후, 우측의 고려삼계탕과 파리바게트 건물 사이 일방통해 도로로 들어가면 좌측에 있는 다독건물이다. 도보로 대략 5분 정도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