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서 창업교육위원장 / (주)대호가 대표] 2편. 자, 희망의 다음 칸으로 가자.
중국 역사에서 가장 불운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전국시대의 제나라 군사였던 손빈일 것이다. 기원전 350년 경 제나라 사람 손빈은 위나라 사람 방연과 귀곡자(鬼谷子)라는 당대 최고의 사상가 아래에서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위나라 혜왕에게 부름을 받고 장수에 임명되었다. 방연은 늘 자신이 손빈만 못하다는 사실에 손빈을 경계했다. 방연은 손빈이 제나라로 가서 자신과 대적할까 걱정하던 중 자신이 몸담고 있던 위나라로 초빙한다. 그리고는 혹시, 위나라 혜왕이 손빈의 능력을 보고 발탁할까 두려워하다가 손빈을 모함해서 빈형(臏刑)과 경형(黥刑)에 처한다. 빈형(臏刑)은 무릎쪽 슬개골만 절단하여 걸어다니지 못하게 앉은뱅이로 만드는 형벌이고, 경형(黥刑)은 먹물로 얼굴에 죄인임을 나타내는 흔적을 남기는 형벌이다.
이후 방연은 손빈의 조상 손무가 남긴 병서를 손에 넣기 위해 손빈을 죽이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거둔다. 물론 방연은 자신이 손빈에게 천인공노할 흉계를 꾸민 것을 철저하게 숨긴다.
두 다리 없이 처절하게 살아가던 손빈은 방연의 늙은 보비로부터 모든 진상을 듣게 된다.
그래서 손빈은 방연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하다가 돼지우리에 던져지게 되었다. 돼지들과 잠을 자고 돼지들의 죽을 먹고 때로는 의심 많은 방연을 안심시키기 위해 돼지 변(똥)을 먹기도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의 모국인 제나라 사신으로 온 친구 금활리의 도움으로 방연으로부터 극적 탈출에 성공한다.
탈출하기까지 손빈은 방연에게서 당한 악행을 복수하기 위해 처절한 삶을 살면서도 탈출에 대한 희망과 복수에 대한 염원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손빈은 제나라로 가서 전기와 손을 잡고 많는 전쟁에서 성과를 내게 된다. 손빈은 제나라에서 군사 전문가로 있으면서 삼사법과 위위구조라는 역사 이래 최고의 전법을 통해 두 차례의 큰 승리를 거둔다. 이후 손빈은 자신의 최대 적인 방연을 처참히 죽이면서 복수의 끝을 낸다.
손빈의 제나라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시절을 만날 수 있었고 유명한 손빈 병법을 자신의 살아생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방연에게 잡혀, 죽기보다 싫은 삶을 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 다시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2호선 지하철에서 신문을 팔았다. 욕심많은 나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판매원에 비해 늘 신문을 많이 신청했다. 매일 지하철 충정로역에서 신문을 지급받고 출발을 해야 했다.
당시 지하철은 10량(칸)과 8량(칸)짜리가 있었다. 판매원들이 거북이라고 부르는 10칸짜리는 승객이 여유 있게 탈수 있었지만 토끼라고 부르는 8칸짜리는 늘 만원이었다. 복잡한 토끼보다는 다소 한가로운 거북이 차량에서 신문이 많이 팔렸다.
토끼 차량의 맨 앞 칸에 타서 마지막 칸을 향해 이동하면서 신문을 팔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석간이여! 중앙일보, 동화일보, 문화일보 있어요!” “신문 500원입니다” 그런데 토끼차량에서는 한 칸에서 몇 장 못 파는 적도 있다. 익숙한 솜씨로 소리를 지르지만 기대만큼 신문 판매가 안 일어날 때 과감히 다음 칸으로 옮겨간다.
실망스런 현실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음 칸으로 건너가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판매원이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다음 칸에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때, 그때 주위를 돌아보면 실망스런 일들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좌절할 것인가? 다소 삶이 실망스럽다고 포기하고 나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계속 좌절의 칸에 머물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다음 칸이 있다.
신문을 팔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언제나 무거웠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밥을 지어먹어야 하고, 텅 빈 냉장고를 열고 무엇을 꺼내 음식을 만들어먹어야 하는가. 밀린 빨래를 언제 다 하나? 때때로 “내 삶은 왜 이렇게 고달픈가?”라는 생각이 들 때면 내 인생이 더욱 처량해졌다. 무엇보다 나를 힘겹게 하는 것은 자취방에 들어가기 전에 남의 연탄을 훔쳐서 불을 폈던 것이다. 연탄 살돈이 없어 며칠에 한 번씩 남의 집 처마 밑에 쌓아 놓은 연탄을 슬쩍 가져가서 피워야 했던 기억은 이제 와서 아련한 추억이지만 무거운 죄를 씻기에는 너무나 슬픈 사연이다.
하지만 나는 현실에 실망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더 견고한 꿈을 꾸었다. 더 좋은 삶을 위해 다음 칸으로 옮겨가길 희망했다. 지긋 지긋한 빈곤의 대학 4년간을 마치고 나는 또 다른 희망의 칸으로 가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일본 유학생활도 나를 편안하게 하지는 못 했다. 일본 동경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건도 많았고 고질적인 허리통증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계획한 시간이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마땅한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힘들게 구한 직장이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었기 때문에 경기도 양평집에서 새벽 6시면 출발을 해야 했다. 처음엔 교통비가 없어서 아내와 연애시절 하루에 500원씩 빌려서 사용했다. 그것도 교통비를 아끼려고 양평역에서 청량리역 행 기차를 무임승차를 했다. 기차 안내양이 차표를 검사할 때면 기차 화장실에 20분씩 숨어 있어야 했다. 화장실 나프탈랜 냄새가 코를 진동하던 그 시절 참으로 고난의 시간이었다.
당시 직장은 월급제가 아닌 영업 수당제였다. 다행히 영업능력이 있어서 3개월 만에 6천 만 원을 벌었고, 1년 만에 1억 5천만을 벌었다. 나는 그 돈으로 결혼을 했고, 잠실 옥탑방에 전세를 얻을 수 있었다. 나머지 돈으로 더 큰 희망으로 가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사업가의 하루하루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도 지금에 와서 지난날들을 뒤돌아보면 늘 희망을 꿈꾸며 다음 칸으로 옮겨 탔던 것은 잘한 일이다.
작금의 시대, 만인들은 “먹고 살기 힘들다” 혹은 “경기가 나쁘다”라고 환경을 탓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왜 환경만을 탓하며 더 높고 큰 세상으로 희망을 갖고 가지 않고 신세타령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두 다리가 잘린 손빈도 불굴의 의지로 방염의 올무에서 벗어나 제나라로 탈출해 자신의 갖고 있는 재능을 발휘하고 후세까지 큰 명성을 떨치지 않았는가….
지금, 여러분의 장사가, 혹은 사업이 힘듭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직 우리가 옮겨가야 할 인생이라는 열차의 칸은 무수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타고 계신 여러분의 인생 열차 칸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남의 연탄 훔쳐서 겨울을 나고, 무임기차를 타던 무일푼의 산골소년도 이렇게 잘 되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더 큰 인생의 열차 칸으로 다시 이동하려고합니다.
“우리 모두 희망을 품고 다음 칸으로 건너갑시다. 다음 칸에 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타고 있는 칸에서 인생을 멈추기에는 남아있는 다음 칸이 너무 아깝습니다.
설사, 다음 칸에도 어려움이 있다면 또 다음 칸으로 가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