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임영서 창업교육위원장, 역사에서 배우는 경영이야기]=나에게 조선시대의 위인 중 한 분을 뽑으라면 나는 이항복 선생님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선생님과 나는 비슷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첫째는 어린시절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는 개구쟁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항복 선생을 잉태한 어머니 최씨가 낙태를 하려고 독극물을 마신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누나 4명을 낳고 몸이 약해서 나를 임신하시고는 또 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독초를 울인 물을 마셨다고 한다.
세 번째는 우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이항복 선생님을 유모가 구해준 사건이다. 나의 어린 시절 마당 가장자리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 우물에 앞에서 배를 땅에 깔고 엎드려서 물을 종종 마시곤 했다. 몇 번이고 우물에 거꾸로 빠져서 죽을 뻔했다. 이후 아버지는 우물옆을 막대기로 막으셨다.
이항복 선생님과 가장 비슷한 점의 백미는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항복 선생님은 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동무들과 산으로 강으로 뛰어다니며 동무들과 놀기를 좋아했다.
이항복 선생이 어린 시절. 어느 날 마을의 대장간 주위에서 놀다가 쇠 조각 하나를 주어 집으로 가져왔다. 공부에 전념하기를 원하셨던 아버지는 그런 이항복을 보고 꾸짖었다. “공부는 안하고 쓸모없는 쇠 조각이나 주어서 다니냐?”고… ..
그 사건 얼마 후 이항복선생님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이후에도 이항복 선생님은 밖에서 놀다가 쇠조각을 주어 집에 갖고 오는 것을 습관처럼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어머니 최씨는 그런 아들에게 “그런 쇠 조각도 언제가는 요긴하게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이해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대장장이가 놀음에 빠지게 되어 대장간은 물론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쇠 조각 하나 없는 거렁뱅이였다. 이항복 선생님은 길가에 앉은 그 대장장을 찾아가, 그 때까지 자신이 모은 쇠조각을 주면서 “이 쇠로 다시 대장간을 시작해 보시죠”라고 했다.
대장장은 선생님께 받은 쇠로 다시 대장간을 시작 할 수 있었다. 대장장은 처음 받은 쇠로 호미를 만들고 그 호미를 내다 팔아 다시 괭이를 만들고, 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물건을 팔아 만든 돈으로 망치를 만들고 쟁기를 만들었다.
그 뒤로 세인들은 이항복선생님의 쇠 조각 일화를 보고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항복선생님의 쇠조각 일화처럼 나에게도 기적적인 어린 시절의 사례가 있다.
나는 가난과 함께 태어나 가난과 함께 자랐다. 물론 1남 4녀 중 막내이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보다 더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언제나 부자가 될 수 있고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 질 것이라 믿고 계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항상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가르쳐주셨다. 내가 사업을 이만큼 이끌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수익은 단조로웠다. 자연에서 얻은 농작물을 양평 읍내 5일 시장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봄이면 취나물이나 머우, 두릅 등 산나물을 뜯어서 파셨고, 여름이면 더덕이나 도라지, 옥수수를 키워 파셨다. 그리고 가을이면 밤을 줍고, 깨, 콩, 땅콩 등을 수확해 파시고, 겨울이면 감이나 말린 밤인 황율을 파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쫒아 읍내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가 농산물을 장터에서 소매로 파실 때 난 언제나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구경했다. 그것이 내가 자라면서 장사하는데 도움이 될 줄은 당시에는 몰랐다. 어머니는 물건을 다 파시면 언제나 10원짜리 한 개를 내 손에 꼭 쥐어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언제나 똑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 10원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10원을 못 모으는 사람은 100원을 못 모으고, 100원을 못 모으는 사람은 1.000원을 못 모은다.” 또 “이 10원이 너의 손에서 떠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움켜잡을 줄 알아야 한다.” 라고… ..
그 때부터 나는 언제나 주머니 속에 동전을 넣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난 주머니 속에 동전을 만지면서 10원의 소중함을 느끼곤 한다.
시장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언제나 1원, 10원, 50원, 100원 짜리를 구분해서 벽장에 있는 솥단지에 넣었다. 그 돈을 한 동안 모아서 염소를 샀다. 염소는 몇 개월 후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어머니와 나는 염소를 정성드려 키웠다. 염소는 들에서 풀을 뜯어 먹기 때문에 사료값이 안 들어가도 되었다.
염소는 임신기간이 약 5개월 정도로 한 번에 평균 두 마리를 낳기 때문에 번식력이 좋은 편이다. 염소를 키운지 3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10마리 이상으로 늘렸다. 그 염소를 팔아서 돼지 한 쌍을 사왔다. 돼지는 염소보다 번식력이 월등히 좋았기 때문에 몇 년 만에 꽤 많은 수의 돼지를 얻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염소를 시작한 것이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는 돼지를 모두 팔아 새끼를 곧 낳을 수 있는 암소를 살 수가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암소를 사서 옆집에 맡겼다. 그 때 우리는 아버지가 키우시던 소가 3마리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키우기는 무리였다. 옆집에 소를 키워달라고 부탁하고 그 소가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는 소를 키워 준 집에 주고 그동안 더 자란 어미 소는 우리가 다시 갖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난 양평읍에서 경향신문을 돌리고 있었는데 J신문 지국장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더 이상 신문사 지국을 운영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옆집에서 키우던 소를 250만원에 양평 우시장에서 팔고 부족한 자금을 어머니가 추가 지원해서 J신문지국을 살 수 있었다. 난 그때부터 비로서 장사가 아닌 사업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그 때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동전들이 모여서 송아지를 살 수 있고 그것을 잘 관리해서 신문사 지국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난 어려서 깨달았다. 어머니는 벌써 30여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나의 어머니 경제학은 나의 사업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나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아들, 딸과 동전이 생기면 통속에 넣는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의 동전 사랑을 유심히 지켜본다. 특히 20, 30대 젊은이들의 동전사랑을 유심히 보고 있다. 10원, 100원 동전을 경미하게 보는 사람들은 결코 크게 성공할 수 없고 경제 철학이 없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를 꺼려한다. 난 어머니에게로 시작 된 10원짜리 경제학을 주변에 전파하고 있다. 우리 회사는 사내에 직원 식당을 만들어 놓고 점심을 제공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직장인들이 점심을 사먹으려고 1만원을 가지고 6000원짜리 점심을 먹고남은 4천원은 온데 간 데 없이 없어진다. 만 원짜리가 깨지면 천 원짜리가 쉽게 없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보통 직장인들은 점심을 사먹기 위해 만원을 갖고 나와서 6천 원짜리 점심을 사먹고는 없어진 4천원은 생각하지 않고 6천원짜리 밥을 잘 먹었다고 생각한다. 없어진 만원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난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라도 돈이 부서져서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외부 방문객이 와서는 직원이 몇 명인데 회사 식당을 운영하냐? 고 의아해한다. 하지만 난 소중한 10원짜리 경제학의 기적을 직원들에게 체험하도록 하고 있다.
나는 자신있게 이야기 한다.
“큰돈을 벌고 싶은가?”
“그렇다면 아주 작은 돈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지금 창업의 전선으로 뛰어드는 창업가가 매우 많은 시기이다. 장기적인 세계 불황과 국내 소비시장의 침체 상황에서 매출의 크기는 그만 그만하다. 누가 돈을 더 모을 수 있는가는 바로 이 10원짜리 경제학을 실천하는 이들이 창업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One Comment
ohkeumsoom
감동 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