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리더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서울교육방송 임영서 창업교육위원장]=지금 당신의 인생에 만족하냐고 물으면 “만족한다” 대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죽을 수 없으니 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언제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의 정상에 선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몽골의 징기스칸일 것이다.
1162년 경 몽골과 시베리아의 일부 초원지대는 수십개 부족이 전투와 납치, 사냥과 유목, 약탈과 교역으로 생존해가는 세계였다. 이때 고난과 역경의 어린 시절을 보낸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이 출현한다. 징기스칸은 중앙아시아를 평정하고 유럽 일대까지 점령해,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징기스칸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어디선가 본 징키스칸에 대한 글로 대신한다.
“징기스칸”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배운 게 없다고 ,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징기즈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명확했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열악한 환경이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무한 경쟁의 시대, 마지막 남은 비즈니스 영토를 정복해야 할 경영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인물이 바로 징기스칸이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이들이 많은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무식하셨다. 술만 드시면 어머니와 누나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셨다. 누나들은 불편한 아버지를 피해서 일찍 출가를 했다.
내 나이 17세 때. 어머니는 마흔아홉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처남, 나는 혼자 못 살아.”
안방 아랫목에 어머니 시신을 눕혀 놓은 채 아버지가 외삼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남들은 3일 장례를 치르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2일 장례를 치르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새 장가를 가시기 위해 어머니께서 일궈 놓으신 땅을 팔아치우셨다. 삐쩍 마르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어머니만 보다가 곱게 화장하고 차려입은 도시 여자들을 보니 매력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어쨌든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개월이 지난 후부터 땅을 팔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속상해서 차라리 아버지가 빨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면 적어도 그 땅은 못 팔 테니까.
고등학교 때 우리 옆집 옆에는 서울에서 교수를 하셨던 분이 새로 이사를 들어왔다. 우리 마을 최초로 보일러와 수도시설도 갖춘 양옥집을 지어서 말이다. 이사 온 옆집 이씨 아저씨는 돈도 많고 학식도 풍부한 분이었다. 여러모로 우리 아버지와 비교가 되는 분이었다.
나는 옆집 아저씨 아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
‘형! 형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
이런 말을 할 때면 다른 한쪽에서는 어김없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차 올라왔다.
‘나는 왜 이런 아버지를 만났을까? 왜 우리 아버지는 가난하고 무식할까?’
대학 4년을 아파트 공사장에서 목수 일을 하고, 연극을 하면서 돈을 벌어 학교를 다녔다.
밉지만 아버지를 위해 주말이든 늦은 밤이든 밥을 하고 빨래를 해야 했다. 그 시절 난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물론 누나들이 있었지만 다들 여유가 없었기에 아버지를 돌볼 수가 없었다.
연탄이 없는 학교 앞 자취방은 언제나 시베리아였고, 전기, 수도가 끊겨서 공원 옆 빨래터에서 아침이면 세수를 해야 했다. 어쨌든 고달픈 대학 4년을 정신없이 보내고, 일본 유학을 위해 양평 아버지 집에서 일본어 공부할 때였다. 나는 추운 방에 화로를 들여놨다. 공부를 하다가 새벽 2시경에 화장실을 가려고 방을 나섰다. 몇 발짝 못 가고 눈 쌓인 마당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연탄가스보다 독하고 무서운 ‘밤나무 화로불’에서 나온 유독가스를 마셨기 때문이다.
새벽녘 쇠죽을 끓이러 나온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시고 나를 간신히 끌어다가 안방에 눕히고 여러 방법으로 깨우려 하셨지만 나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를 불렀다. 옆집 아저씨 부부는 수지침도 잘 놓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지침을 맞고도 깨어나지 못하자 옆집 아저씨 부부는 돌아가셨다. 우리 마을은 지금도 버스가 다니지 않는 산골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급한 마음에 나를 등에 업고 양평 읍내로 내달렸다. 오로지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얼마쯤 갔을까? 나는 아버지 등에서 몽롱하게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조금 씩 차리는 나를 길가에 내려 놓으셨다. 길가에 눕듯 앉아서 보니 아버지는 곧 숨이 멈출 듯 헐떡이셨고 땀에 젖은 등에서는 굴뚝처럼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난 위대한 아버지를 발견했다. ‘무식하고 가난한 아버지이지만 저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시구나!’ 아버지는 옆집 아저씨가 할 수 없는 사랑을 아들에게 주셨다.
“옆집 아저씨가 아무리 돈 많은 부자이고 똑똑한들 그저 옆집 아저씨일 뿐, 나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법 … ..”
그날 새벽 나는 눈 덮인 길 위에 앉아 아버지를 원망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내 스스로 약속을 했다. “앞으로 아버지를 다시는 원망하지 않겠다”라고 그리고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다가온다고 해도 그것을 원망하지 않겠다.”라고… ..
나는 그 사건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역경과 고난을 즐기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주변 환경을 탓해보지 않았다. 고난과 역경이 온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 나는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지금까지 아버지와 집안 환경을 탓하고 있었다면 오늘날 나는 없었을 것이다.
사업가의 길은 언제나 외롭고 힘든 길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 보면 비를 만날 수도 있고, 바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왜 나에게 이런 역경이 오지!” 라고 부정적으로 거부하기보다. “이 역경이 지나고 나면 좋은 기회를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긍정이 우리를 더 발전시켜 줄 것이다.
나는 이 시대에 현실에 안주하고 더 큰 미래로 나가기를 두려워 멈춰있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돈이 없다고, 배운 것이 없다고,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그래서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는 위대한 리더가 되겠다”는 각오를 하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