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팽이는 배추잎 속에서 행복하다
사람은 이불을 덮고 잠속에 묻히면, 단잠에 들어가면, 그 얼굴이 평온하고, 달팽이는 배추잎 속에서 편안한 잠을 얻는다. 나뭇잎도 좋고, 흙더미도 좋지만, 달팽이에게 가장 안락하고 편안한 장소는 배추잎이다. 왜냐면 숨기에 안성맞춤이다. 흙더미는 숨을 수가 없고 단지 색깔이 비슷할 뿐이고, 나뭇잎은 올라가는 것이 달팽이에게 상당히 부담스럽다. 반면 배추잎은 잎사귀 속으로 살짝만 들어가도 몸을 숨길 수 있고, 눈만 뜨면 먹을 것이 깔려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5개월 정도 달팽이를 키우면서 이제는 제법 노하우가 생겼다. 그 전에는 달팽이 양육이 아주 무식했다. 이 작은 달팽이를 키우는데도 양배추가 상당히 많이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치우는 것이 일이었다. 왜냐면 양배추를 물속에 넣고서 통째로 달팽이를 주었다. 달팽이는 양배추 속으로 몸을 숨기고서 살만큼 살아보라는 식으로 그대로 놓고서 키웠다. 설마 살까 했던 녀석이 벌써 5개월이 넘어섰고, 작은 달팽이도 엉겹결에 생겨서 2마리 달팽이가 내 앞에 있다.
지난주부터 달팽이 운동도 시키고 있다. 달팽이 운동은 달팽이들이 나뭇잎속에만 머물러 있어서 큰 나뭇잎 위에 올려놓으면 내려갈 길을 찾으면서 활동력이 원할해진다. 달팽이가 아무리 유연해도 날마다 움직이지 않으면 운동속도도 느릴 수 밖에 없다. 처음에는 움찔움찔하던 녀석들도 이제는 손가락을 뻗으면 손가락 위로 금새 올라와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들은 내 손가락을 어떤 물질의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나뭇잎 위에 올려놓았더니, 어제부터 뭔가 달라졌다. 그 동안은 달팽이 두 마리가 각자의 존재체로서 서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가령, 내 손가락이 이들에게 다가가면 이들은 무섭고 두려운 반응을 일으킨다. 달팽이들도 서로 만나면 그렇게 반응했다. 그러다가 내가 자꾸 같이 붙어있게 했더니 제법 친해졌는지 나뭇잎위에서 서로의 존재를 맘껏 만지면서 절벽끝과 같은 나뭇잎 가장자리에서 더듬이를 서로 악수하듯 반갑게 논다.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사람은 평지에서 춤을 추던지, 놀던지 할 것인데 달팽이에게는 자신이 있는 위치가 평지다. 모서리에 몸을 붙이고서 공중곡예를 하듯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낯선 사람을 만난 반응이 아니다. 친구를 만나듯 서로가 서로의 더듬이를 내어주면서 인식한다는 것은 존재세계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친밀감이 없다면 어찌 달팽이들이 움직이는 물체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더듬이로 상대의 더듬이를 인식할 수 있고, 자신과 비슷한 어떤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인식하는 자각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달팽이는 움직이는 외부의 물체에 대해 두려움의 반응을 가져야하는데 둘은 그렇지 않았다. 달팽이의 향연은 절벽끝에서 그러했다.
본래 달팽이는 나뭇잎 위에 올려놓으면 어떻게 그곳을 내려올까, 그것에만 몰두했다. 앞으로 전진, 갈 곳이 없으면 뒷면으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모색하는데만 몰두했다. 2~3바퀴 돌고서 줄기를 찾아내고야 마는 달팽이의 집념인데, 오늘은 이 달팽이들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로의 움직임을 분명 알고서 각자가 옆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눈치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느낌으로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달팽이도 더듬이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창조물로서 창조주를 알아보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다. 생각의 더듬이를 펼쳐야한다. 생각을 집중하면 더듬이는 위로 솟는다. 두 손 뻗듯 생각과 영감을 뻗어서 하늘을 향해 간구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생각에 분명 임재할 것이다. 달팽이들도 서로 만나면 저렇게 좋은데,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또 얼마나 좋겠는가?